실체를 모르면 속는다는 우화가 있다.





요식업 전문 빌딩에, 쥐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빨간 고양이가 있었지. 빨간 고양이는 쥐약을 먹고 발버둥치는 쥐를 잔인하게 발라 먹고서 옥상에서 전사했지. 빨간 고양이가 죽자, 쥐들이 1층 식당으로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었다. 화가 난 식당 주인이 죽은 고양이를 아래로 던지자 죽은 고양이가 한 번은 튀어 올랐다. 이에 쥐들이 찍-찍 거리며 흥분을 했지.

“어, 이상해. 죽었던 빨간 고양이가 부활했나봐. 빨간 고양이가 벌러덩 누워서 죽은 체 하고 있어, 쥐들아, 살려면 빨리 흩어져라.”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고, 상대 마음은 더욱 모르겠고, 초 단위로 변동하는 주식의 종가(終價)도 모르고, 누가 승리자가 될지를 모르고, 언제 지진이 발생할지 모르고, 5분 뒤의 나를 모른다. 현재의 원인을 기초로 미래 결과를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은 온통 모름의 연속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현재 위치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시공의 제약을 받는 유한자다. 유한자인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뿐이다. 미래를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 물리학이 있다. 1975년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물리학의 도(道)’라는 책을 통하여, 최종 관찰을 하기 전에는 어떤 결과도 단정 짓지 못한다는 양자역학을 발표했다.



양자역학은 고양이 실험으로 설명한다.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고, 독약이 든 약병을 상자 꼭대기에 단다. 양자(전자) 운동에 의해 독약 병을 깨뜨려 고양이를 죽일 확률은 50 대 50이다. 관찰자가 관찰을 행하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혼재된 상태의 허깨비로 존재한다. 관찰자의 관찰이 행해져야 비로소 살아있는 고양이냐?, 아니면 죽은 고양이냐? 가 결정된다.> 양자역학은 미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불확실성을 증명하면서, 물질세계의 진리로 통했던 고전 물리법칙(관성, 가속도, 작용 반작용 법칙)을 무너뜨렸고, 양자역학은 원인과 결과가 일치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 선(善)한 행동에 복을 준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공식까지 붕괴시켰다. 양자역학을 통해 행복의 원리를 살펴보자.



1) 정해진 불행도 정해진 행복도 없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관찰이 끝나기 전에는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알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보는 최종 상태로서의 현재뿐이며,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과 내가 현재 위치한 공간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가 진보하면서 인간의 유전자 프로그램에 체험적 위기의식이 추가되어 신념은 약해졌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원숭이가 되면서, 현재마저 근심과 걱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5분 뒤를 예측할 수 없으면서 스스로 미래의 걱정을 미리 가져와서 불안해하고, 하나라도 마음에 걸리면 현재가 고민에 빠진다. 현재마저 고민과 고통에 잡히면 현재도 실체가 없는 허깨비로 존재하고 행복도 없다. 5분 뒤에 사형을 받더라도 지금이 행복하면 행복한 것이다. 결국 행복은 내가 주도할 수 있는 현재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확실한 현재를 행복 상태로 만들어 미래 또한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 확실한 현재에 활동의 중심을 두고, 강한 마음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불확실과 불행을 무시하고, 난, 마냥 행복하다고 마술을 걸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2) 불행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식일 뿐이다.

현재의 고민과 고통은 껍데기일 뿐이다. 지금 불행하다면 불행한 이유를 백지에 적어보자. <지나간 서러움과 아픈 추억, 어제 마신 술로 인한 육신의 쓰라림, 아침의 부부싸움이 마음에 걸리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직장 상사와의 갈등, 현재를 압박하는 카드 빚, 실수로 손해 본 일, 밥벌이의 불안, 사고로 인한 몸의 부자유, 가난으로 인한 물질의 궁핍, 동료의 말 한마디까지 자존심의 안테나에 걸린다.> 불행한 이유는 수 만 가지가 넘을 것이다. 백지에 적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일과 실수도 있을 것이다. 불행의 이유로 나열한 대다수의 일들은 스스로 마음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거나 생활의 불편 요소일 뿐이다. 욕망과 욕심으로 행동이 흐려지고, 정당한 활동을 제한하여 인간 구실을 못하게 하는 물리적 구속은 불행한 일이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욕심과 결벽증이 만든 허깨비들이다. 마음이 만든 불행은 실체가 없다. 속 쓰림은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되고,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되고, 마음으로 수용하고 행동하면 해결 못할 일이 없다. 행복하려면 허깨비로 존재하는 불행에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3) 초월로 고통과 불행의 블랙홀을 뛰어넘어라.

물질 속에는 물질 속을 뚫고 나가는 중성자가 있듯이, 마음에는 고통을 뛰어넘는 초월이 있다. 초월의식은 물질과 정신, 선과 악, 주체와 객체, 지배와 피지배, 원인과 결과라는 개별성과 연결성을 무효화시킨다. 인간 구실을 벗어나려는 초월은 현실 도피지만,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뛰어넘는 초월은 자기 보호다. 초월은 미움과 분노를 넘어 사랑으로, 죄의식을 넘어 자유로, 허상을 깨고 실체로, 높은 위치와 물질적 풍요를 넘어 평화로 가게 한다. 진정한 초월은 나의 존재를 허깨비로 만드는 근심과 걱정, 고통과 불행의식을 녹이고,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위로한다. 허깨비로 존재하는 불행을 직시하고 뛰어넘으면 불행은 불행으로 소멸된다. 세상을 통찰하고 초월의 에너지가 가동되면 지금의 고통과 욕망, 죄의식과 부족감의 블랙홀은 사라지고 행복임의 광장이 열린다.



4) 영혼으로 고통과 불행을 흡수하라.

초월은 현실을 뛰어넘어 의식의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행동이라면, 영혼은 받아서 흡수하는 영역이다. 영혼은 죽지 않는 영원한 에너지이며, 모순과 혼란, 파괴와 혼돈을 통찰하면서 방향을 잡는 실체이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가져간다. 영혼은 감성과 영성의 결정체다. 영혼이 맑고 강하면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하나지만, 영혼이 흐리면 마음의 장난에 믿음이 깨지고, 불행과 불확실을 두려워하고 허상에 놀아난다. 영혼이 깨어 있으면 행복의 적은 불행이 아니라 오만과 독선이다. 운전자가 시동을 끄고 키를 뽑고 나올 때까지는 ‘살았다. 죽었다.’를 단정 짓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이 안정되기 전에는 결정된 행복은 없다. 악마가 쳐놓은 어둠의 사슬은 초월로 뛰어넘고, 힘이 부족하면 영혼으로 행복을 찾자.



5) 통찰(洞察)은 불행도 행복으로 해석한다.

통찰이란 처음과 끝을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통찰은 믿음의 눈으로 우주의 시작과 끝, 우주의 일부인 개인 생명의 시작과 끝도 알게 한다. 통찰은 출생이 시작이 아니라 전생의 연속이며,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탈바꿈과 환생의 시작이다. 통찰하지 못하면 연결된 세상을 모르고 자기중심으로 행동하고, 소유와 권리로 행복을 찾다가 사람을 잃고, 활동할수록 고통과 불행을 만든다. 통찰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상이며, 꿈속의 꿈이요, 허상속의 상상이다. 결국 불안과 두려움이 생겨 개처럼 짖으며 동요한다. 통찰의 힘이 생기면 불행과 행복의 시작과 끝을 알기에 노력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며, 현재의 강한 마음으로 행복을 찾고, 누린다. 통찰의 눈은 깊고 멀리 내다보면서 물속의 물처럼 하나로 어울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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