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 (共話 : 서로 이야기하다)

                                                - 내 마음을 아실 이



명심보감 성심편에 보면 대면공화(對面共話)해도 심격천산(心隔千山)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 뜻은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는 하나 마음은 천산을 격해 있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매우 다정한 것처럼 마음을 맞대고 이야기를 주고 받지만 마음은 딴판이라는 것이며 또한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혼자만 멍청해진 것 같아 창피할때도 있고, 때로는 네 탓이 아니라 상대방이 못된 것이기 때문에 속은 내가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해 본다.







내 마음을 아실 이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을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로련만
불빛에 연긴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이 시는 1연에서는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다면 2연에서는 나의 순수한 사랑을 바치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러나 3연에서 다시 그러한 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4연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시이다.





이 작품은 김영랑의 작품인데 김영랑은 1902년 전남 강진군 강진읍에서 태어나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우리나라 언어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녹아낸 시인이다. 그는 휘문의숙에 입학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나,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던 영랑은 유명한 음악회가 있을 때마다 상경하여 관람하고 그 후에도 소리꾼을 직접 집으로 불러들여 음악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작품세계에 아름다운 리듬으로 남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1930년 <시문학> 의 동인이 되고 박용철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실린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김영랑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오래동안 글을 안쓴다. 그는 일제말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몇 안되는 문인 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복을 거부하고 한복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숨어 지내다가 서울 탈환 전쟁 중에 유탄을 맞고 9월 29일 사망한다.



영랑은 우리나라 대표적 순수 서정시인이며 거의 일생의 대부분을 고향인 강진 땅에 살면서 문학과 음악과 더불어 살았던 시인이다. 거기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고 평생 돈 걱정을 안했을 것 같은 시인이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지만 또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도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영랑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하지만 시인이 기다린 것처럼 어딘가 그 사람은 있을 것이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이 그것도 내 마음과 똑같이 말이다. 그리고 요즘 생각하는 건데 없다면 일단 말하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면 누군가 생기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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