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안모옥온(心安茅屋穩: 마음이 안정되면 초가집도 편안하다)

    -정지용의 「향수」




명심보감 存心篇(존심편)에 보면 심안모옥온(心安茅屋穩)이요 성정채갱향(性定菜羹香)이니라 구절이 있다. 이 뜻은 “마음이 안정되면 초가집도 편안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라는 것이다.




  언제나 분수에 맞게 살고, 자기 생활에 만족할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근데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래도 누구나 늘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정지용의 “향수” 라는 시에서는 고향 마을의 정경을 한편의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어 고향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향수

                    정지용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중략-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정지용 전집 시, 민음사, 1992.)










 이 시는 실개천이 흐르고 옥답을 일구어주는 착한 얼룩백이 황소가 열심히 일을 하다 잠시 쉬는 한가로운 풍경으로 시작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풍경으로 충북 옥천이 고향인 정지용 시인의 마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거기에는 늙으신 아버지가 편안히 짚베개를 돋아 고이며 졸고 계시는 곳으로 잔잔한 평화가 있는 마을의 정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린 누이와 아내가 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함께 보낸 누이가 있고, 궂은 일에 온갖 고생을 참고 지내던 조강지처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가족의 모습으로 특정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지닌 고향마을에 있는 가족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을에 “하늘에는 석근 별”, 보통 “석근”을 성긴( 드문드문하다)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성기다”라는 뜻이라면 시인은 “성근”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필자는 “석근“을 “석긴”의 변형으로 밤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섞이어 빛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마지막 연에서는 많은 별들이 빛나는 밤에 가난한 집이지만 흐릿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구수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연상한다.




이런 고향마을을 시인은 매연마다 회상하고 각 부분마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표현이 이어짐으로써 간절한 그리움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그 절실함을 더해준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모두 있어 행복한 고향의 모습, 그래서 늘 돌아가고 싶고,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공간으로 “마음이 안정되면 초가집도 편안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라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정지용 

1902. 5. 15 충북 옥천 출생 ~?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동인지〈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1930년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과 구인회(九人會)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로 활동했고  1946년에는 〈경향신문〉에서 주간을 맡았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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