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9일은 WFTO(세계공정무역기구)가 정한 세계 공정무역의 날 (매년 5월 두번째주 토요일)이었다. 페어 트레이드는 중간상인에게 이윤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농민을 비롯한 제3세계 생산자들과의 직거래를 통해 그들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수준을 개선시키고 세계화의 폐해를 줄이자는 것에서 출발한 운동이다.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국가에는 구호 위주의 지원 정책보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공정한 무역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지원 방향에 해당된다. 따라서 페어 트레이드의 캐치프레이즈가 ‘원조가 아닌 무역을!’인 것이다.

페어 트레이드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커피 농민의 가난이 있다. 커피콩 값은 폭락하는데도 소비자가 사먹는 커피 값은 오히려 오르고, 물가는 오르는데 커피콩 값은 하락하는 등 불공정 무역이 불러일으킨 폐해에 대한 자각에서 페어 트레이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진한 향기가 나는 검은 음료 속에 착취당하는 커피 농민, 불공정 무역으로 가난에 신음하는 그들의 시름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이 얘기가 떠오를 것이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농민이나 노동자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의 생산물을 헐값으로 구매하는 불공정하고 비도덕적인 무역관행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도 화가 나지 않는 소비자가 있을까?

불공정 무역구조를 공정하게 바꾸기만 해도 제3세계의 가난한 삶이 훨씬 나아질 수 있지만, 기업이나 무역상은 자발적으로 무역구조를 공정하게 바꾸려 하지 않으므로 시민단체가 나서서 이를 주장하고 유도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소비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페어 트레이드 운동의 주장은 하나의 소비문화가 되었고, 기업이나 무역상은 거부할 수 없는 소비자의 강력한 힘에 밀려 결국 페어 트레이드에 속속 동참하고 있는 중이다.
페어 트레이드가 가장 활성화된 지역은 네덜란드와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의 유럽이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되는 제품은 커피, 차, 설탕, 과일, 꽃, 의류, 화장품, 축구공 등 수백 종에 이르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대형유통매장에서 페어 트레이드 관련 제품만 따로 모아 파는 코너도 마련해두고 있다. 물론 일반 제품보다 가격은 약간 비싸지만, 비교적 적은 액수로 지구촌의 빈곤문제 해결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페어 트레이드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다.

도덕적 소비는 원재료나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고 기업의 동참을 유도하는 데서 더욱 확대되어 이제는 노동문제, 환경문제, 기부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페어 트레이드 운동은 소비자를 자각시키는 동시에 기업을 자극했다. 그런데 자각한 소비자로부터 자극을 받은 기업은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페어 트레이드 운동이 확산되고 소비자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페어 트레이드 시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기업은 기존 시장을 잃을 수도 또한 새로운 시장을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수많은 글로벌기업을 비롯한 대기업이 페어 트레이드에 동참하게 되었다.

페어 트레이드가 일부의 소규모 활동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07년 기준으로 IFAT(국제페어트레이드연맹)에 가입한 국가는 70여 개이고, 페어 트레이드와 관련된 조직이나 생산자 단체만 해도 3천여 개에 이른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은 유럽이다. 페어 트레이드 운동이 생겨난 곳도 유럽이고 전 세계 페어 트레이드 관련 매출의 2/3 가량을 발생시키는 곳도 유럽이다.
에 따르면 소비자는 유럽 내의 7만 9,000개 판매점을 통해 페어 트레이드 관련 제품을 구입할 수 있으며, 연간 소매 판매액은 6억 6,000만 유로 이상이라고 한다. 이 규모는 2000년 조사 결과 대비 154퍼센트나 증가한 것으로 연평균 20퍼센트의 고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 페어 트레이드 제품을 확산시키는 일등공신은 기업의 적극적인 동참이다. 유럽 내의 5만 6,700여 개 슈퍼마켓에서 페어 트레이드 제품을 취급하고 있는데다, 기업이 더 많은 관련 제품을 내놓고 있어 누구나 쉽게 페어 트레이드 제품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페어 트레이드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영국의 경우 커피가 20퍼센트, 홍차가 5퍼센트, 바나나가 5.5퍼센트이고, 스위스의 경우 바나나가 47퍼센트, 꽃은 28퍼센트, 설탕은 9퍼센트에 해당한다. 이는 특정 영역에서 도덕적 소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어 트레이드는 더 이상 시민운동단체나 소비자운동의 일환으로 소규모로 이뤄지던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당당히 주류 상업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페어 트레이드가 반드시 기업을 옥죄는 위험요소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페어 트레이드 덕분에 기업은 전보다 높은 원가 부담을 지게 되었고 당장 수익이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페어 트레이드를 통해 생산해낸 상품은 기존의 상품과 다른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소비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소비자를 통해 페어 트레이드 제품으로 보다 많은 이익을 낼 수도 있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대형 유통회사가 페어 트레이드를 마케팅 차원에서 활용하게 되면 소규모의 페어 트레이드 상품이나 영세한 시민단체의 유통매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결국 페어 트레이드도 초기에는 시민단체와 소비자가 이기는 게임이고 기업이 지는 게임 같지만, 기업이 전략적으로 이용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을 창출해 기업이 이기는 게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페어 트레이드를 비롯한 각종 도덕적 소비를 마케팅에 적용하는 기업이 점점 늘고 있다. 이는 소비자의 무기였던 도덕적 소비를 기업이 역이용하는 것으로, 도덕적 소비는 기업에게 당장은 위기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회임을 증명해준다.

-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www.digitalcreator.co.kr)

* 본 칼럼은 제가 쓴 책 <소비자가 진화한다 (김용섭 저, 김영사, 2008. 3)>의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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