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능이 생각이다. 뇌의 구조 중에서 전두엽 특히 기저핵에서 행동계획과 기억 및 정서표현에 관련한 기능을 담당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들을 조합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점을 찾고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다. 생각의 다양성의 정도는 저장된 정보의 정도와 비례한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이 없다는 말이다. 단순화 작업은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단 양질의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떤 정보를 저장할 것인가이다. 그것이 어떤 정보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지극히 자기적인 선택에 따른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도 자신이 수용하지 못하면 배척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사람이 가진 소양(素養)은 그 사람의 됨됨이다. 노력한다는 것도 그러한 그릇이 있어야 가능하다. 원래부터 그러한 사람은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한 삶을 산다. 그것의 그러함의 가치는 단정할 수 없다. 인문학이 천대받는다는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아 요즘은 인문학 천국인 듯하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의가 열리고 인문학과 관련된 모임들이 난무(亂舞)한다. 문제는 아무리 많다한들 듣는 사람만 듣는다는 것이다. 생각도 하는 사람이 하고 행동도 하는 사람만 한다.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착실히 등교하는 아이들만 매번 지각하면 안 된다는 꾸중을 듣는 것과 같다. 강화(强化, reinforcement)는 또 다른 강화를 불러와서 부담으로 작용한다.



생각에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 긍정을 만들어 내는 생각, 부정을 극대화하는 생각 등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생각도 있고 인생을 말살시키는 생각도 있다. 이런 생각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선택한다.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생각의 방향을 잡는 것도 본인이고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을 단절시킬 수도 있고 생각의 폭을 넓힐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에 몰입한다. 몰입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늘 생각했던 그 패턴을 벗어나질 못한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다. 두렵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지금까지의 자기(自己)가 없어 질 것 같은 두려움이다. 생각의 형태를 전환하면 여태 이루었던 자신의 삶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불안이다.



나이가 50을 넘어가면 사람들은 아집(我執)이 생긴다. 살만큼 살아봤고 겪을 만큼 겪어 봤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은 관철되어야 하고 자신의 삶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에 매몰된다. 정말 그럴까? 물론 이룬 업적이나 꾸려온 살림살이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하지만 보여 지는 무엇이 아닌 참으로 ‘나’라고 하는 그것의 삶도 정말 그러한지는 살펴볼 일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정말 행복하다면 성공이다. 내가 행복한 것처럼 내 가족도 내 이웃도 그러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삶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룬 업적만큼 허전함은 더해가고 쌓인 명함만큼 외로움이 더 커져간다면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생각해 볼 일이다.



생각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것이어야 옳다. 더불어! 함께! 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말은 없다. 그 일은 나를 내려놓지 않고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모두가 내 것을 움켜쥘 때 놓아야 하고 모두가 나를 위할 때 너를 위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더불어 함께다. 생각은 그런 일에 쓰여야 하고 생각은 그렇게 흘러가야 맞다. 마음을 열어야 귀가 열린다. 마음은 자신의 의지로 가능하다. 결국 자신을 위한 노력이다. 자기가 정말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으로 시작해서 집단, 사회, 국가로 이러질 것이다. 더 갖기 위해서 내려놓는 것은 진리다. 더 갖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고 내려놓은 것은 타인의 행복이다. 생각은 그렇게 쓰여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 건설적인 생각, 살리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써 낙관하라” — 안토니오 그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