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 튀는, 그러면서도 은근한 멋을 지닌 독특한 목소리. 강박사였다.

탁월한 공부 실력만큼이나 어필하는 음색. 똑똑한 여자들, 잘 나가는 여자들의 목소리에서 흔히 나오는 쇳소리가 강박사한테서는 나지 않았다.

“원장님, 가까운 시일 안에 뵙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십시오.”

<박사님께서 좋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십시오>

“모레, 금요일 오후 4시, 지난번에 뵈었던 커피숍 괜찮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구정 날 만났을 때 특별히 어두운 구석은 없었던 강박사였는데 무슨 일일까?

아들 결혼과 관련된 문제인가? 아니면 김사장과의 마찰?

 

강박사의 일주 경신(庚申)과 계미(癸未)시가 연상되면서 「혹시 이혼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이로 보면 환갑이니 인생 황혼의 초입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뜻하지 않은 돌풍이 일고 아픔은 어쩔 수 없이 찾아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낮이 지나면 밤은 어김없이 펼쳐진다.

 

얼핏 화려해 보였던 강박사의 삶은 껍질에 불과할 뿐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경금(庚金)이 계수(癸水)를 보면 반드시 썩는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고전(古典)에서는 경금봉계수필부(庚金逢癸水必腐)라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5년만 지나면 강박사는 건강과 가정, 직장, 금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예 때문에 아내, 엄마의 자리를 지키려고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아파도 참고 살아왔음이 분명해 보였다.

 

춘분을 코앞에 두고 강박사를 만났다. 강박사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중단됐던 계수지공(癸水之功)의 공부방을 다시 열 수 없느냐고 물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모범 학생이 되겠습니다.”

<학생들 간에 공부의 차이가 날 것입니다. 배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르쳐야 할 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공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강박사 수준이면 혼자 하셔도 될 터인데…>

 

계수지공은 현묘지도(玄妙之道)란 말과도 통한다.

현은 하늘의 지혜를 말함이다. 어두운 밤의 세계를 알아야 낮을 알 수 있고 이는 음양의 이치이며 남녀의 세계이며 호흡이며, 먹고 마시고 배설함이며, 물과 불의 조화이며 손바닥과 손등, 앞과 뒤, 삶과 죽음을 연결하고 있는 원리이며 진리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지혜의 세계인 것이다.

 

공부방이 마련되면 연락하기로 하고 강박사와 헤어졌다. 오사장과 약속한 춘분은 내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준비해둔 날 이었다.

사실은 오래 준비해온 부탁을 하려 했는데 때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