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기억되는 나라들이 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의 이탈리아,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의 프랑스, 바즈 루어만(Baz Luhrmann)판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브라질, 아핏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영화들의 태국,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영화들의 일본, 왕가위(王家卫) 영화들의 홍콩, 그리고 허우샤오시엔(侯孝賢) 영화들의 배경이된 타이완(臺灣). 이렇듯 나는 영화에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따라 종종 여행지를 선택하곤 하는데 타이완도 그러했다. 타이완을 여행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특히 그의 1986년 작품 [연연풍진(戀戀風塵)] 때문이었다. [연연풍진]은 1965년 타이완의 탄광촌에서 자라 생계를 위해 타이페이로 떠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진과스(金瓜石)와 지우펀(九份)이 그 배경지다.



▲ 진과스와 지우펀의 굽은 산길도로를 오르내리는 버스의 모습

 

슬픈 도시락

  타이페이에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진과스와 지우펀이 있는 루이팡(瑞芳)지역으로 향했다. 타이페이 시내에서 한 시간 반정도 버스로 내달리면 그럭저럭한 신식 풍경들은 제 나이를 표현하는 낡은 멋진 풍경들로 변모한다. 루이팡(瑞芳)지역의 낡은 건물들, 철재 간판의 녹물들이 흘러내린 빛 바랜 건물외벽들이 뺨에 닿을 듯 가까이 버스 맨 뒷자리에 기대어 앉은 내 얼굴 뒤로 스쳐 지나간다. 너무도 적절한 [연연풍진]으로의 여행 관문. 덜컹이는 만원 버스는 지우펀을 향해 굽이굽이 오르기 시작하고, 지우펀에서 많은 관광객을 한차례 뱉어낸 뒤 더욱 덜컹이며 진과스(金瓜石)를 향해 또 굽이굽이 내려간다. 한참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득하게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것을 보니 이곳도 꽤 높은 곳인듯 싶었다.

진과스는 금을 캐던 금광으로 금광산업의 전성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완전한 관광지가 되어 살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스치는 사람들로만 북적였다.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단체 관광객들로만 북적이는 모습이 진과스를 박제된 마을처럼 느껴지게 했다. 광산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입구의 광부 동상에서 느껴지는 정도. 설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매표소를 지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장을 한 뒤 광부도시락을 먹으러 가는데, 광부도시락은 진과스 관광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관문으로 소문이 나있기 때문이다. 도시락에는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기에 나 또한 매우 먹어보고 싶었고,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단체관광객들을 따라 도시락 판매소로 향했다. 천으로 감싼 철제 도시락 안에 흰 쌀밥, 간장에 졸인 계란과 세가지 반찬, 큼지막한 돼지고기 튀김… 뚜껑을 열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과연 광부들의 도시락도 이렇게 화려했을까? [연연풍진]에서 가난한 삶과 설움의 메타포로 등장하는 도시락이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있으니 서글프기까지 했다. 너무도 세련되고 아름답게 정리된 진과스의 모습들.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기에 진과스가 부활하고 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과거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과스는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곱게 단장한 갱도로 가는 철길을 거닐자니 부활은 커녕 점점 소멸되어가는 진과스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마치 주인공 '완'이 떨군, 철길 위에 흩어져 나뒹굴던 [연연풍진]의 슬픈 도시락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달까.



▲ [연연풍진]의 한 장면. 철길 위에 나뒹구는 도시락이 슬프게 느껴졌다.

 

간헐적 암전

 진과스로 향할 때 보다 담담한 마음으로 지우펀(九份)의 지산제(基山街)와 '수치루(竪崎路)로 향했다. 원래는 아홉 가구밖에 없는 마을로 아홉 가구가 다른 마을에서 얻어온 생필품을 9분(份)하여 나누어 썼다고 하여 붙은 소박한 이름 지우펀(九份). 지우펀도 역시 지금은 관광지화 되어 전혀 소박하지 않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의 화려한 홍등가 배경으로 더욱 알려져 있는 수치루(竪崎路)는 반대로 화려한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수치루는 홍등에 불이 켜지지 않았음에도 사진을 찍으려는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기도 하고, 북적임이 싫기도 하여 보는 둥 마는 둥 수치루 아래 외진 곳에 위치한 성핑극장(昇平戲院)으로 몸을 피했다. 다른 세계로 입장하는 듯, 성핑극장은 수취루와는 달리 어둡고 조용했다. 금광산업의 번성하던 30년대에는 대만에서 가장 큰 극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하는 설명을 읽으니 더욱 공허하게 느껴졌다. 고단한 지우펀 주민들이 울고 웃었을 산중의 극장.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이 극장의 스크린 앞에 앉아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낡은 빈 의자들의 침묵 속에서 영화 [연연풍진]의 간헐적인 암전들을 떠올렸다. 전력이 부족하여 정전이 끊임이 없었던 작은 마을, 깜빡이는 사람들의 삶, 그 삶의 고단함을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 도시에 나와 같은 삶의 고단함을 지녔을 오래 전 사람들의 모습으로부터의 위로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삶은 왜 이렇게 고단하게 깜빡이는 걸까? 나는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노쇠한 극장 스크린 위에 고단했던 삶의 순간들을 영사하며 그렇게 앉아있었다.



▲ 성핑극장 외관에 그려져 있는 영화 [연연풍진(戀戀風塵)]

 

 다시 떠오를 해, 석양

성핑극장을 나서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수취루 홍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터지는 폭죽파티라도 목격하는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흥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새빨간 홍등이 아니라, 어렴풋한 붉음으로 마을 끝에 걸터앉은 석양이었다. 나는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 테라스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밀려가면서 석양도 점점 바다 쪽으로 번져갔다. 여행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왜 항상 짧고 아쉬운지 명멸하는 붉은 빛을 차곡차곡 눈 속에 담았다. 구름이 가득한 지우펀 마을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 비슷한 풍경이 등장하는 [연연풍진]의 마지막 장면이 또 떠올랐다. 도심의 삶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주인공 '완'에게 담배를 권하며 완의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감자는 넝쿨을 잘라줘야 잘 자라기 때문에 인삼보다도 키우기가 힘들어. 빌어먹을. 감자가 인삼보다 힘들어"

그다지 화려하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만 같은 삶 속에서 나는 힘겹게 스스로 넝쿨을 잘라가며 감자처럼 살아왔는지 모른다. 시들지 않고 대견하게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생각하며, 눈 앞의 지는 석양을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우펀의 지는 해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어차피 다시 떠오를 해니까. 삶은 계속되니까.



▲ 카페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았던 지우펀의 석양.

 



▲ [연연풍진] 속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대화장면

 



▲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진과스의 풍경

 

글,사진: 이미진(torofilm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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