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패랭이

안개와 패랭이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줄기가 사방으로 번져 꽃이 줄기마다 피어오르는 모양이 안개가 번지는 것 같다. 꽃 모양이 안개꽃과 흡사하다. 패랭이는 옛날 신분이 낮은 서민들이 즐겨 쓰는 모자의 일종인 패랭이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패랭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박해 보이지만 줄기 하나, 하나의 선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길게 늘어진 줄기의 자태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여유로워진다.  가는 줄기가 약해 보이지만 만져보면 선비의 붓 터치처럼 힘이 있고 명쾌하다.  단, 꽃이 매우 작아 정원에서 존재감이 없다.  다른 꽃무리 속에 파묻혀 꽃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개패랭이를 보면 흡사 이 시대의 가장인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중2때 저지른(!)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의 볼록한 양복 호주머니 속에 많은 지폐가 든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후에도 그 돈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지폐 몇 장을 훔쳐 친구들과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을 사먹은 적이 있다.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너무도 두려워서 어머니께 솔직히 말하고 아버지 몰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그 돈을 넣어두려고 아버지의 양복 호주머니를 열어 본 순간 “아부지!”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호주머니 속은 예전보다 더 부풀어 있었고 어린 내가 쓰기 좋도록 천 원짜리 지폐 수 십 장을 바꾸어 넣어두셨던 것이다. 너무나 놀란 나는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으로 뛰어가 용서를 빌었다.

"아부지.. 제가.. 잘 몬해써예.."

"괘안타.. 말 안해도 된다.."

그 분이 내 아버지다.  아버지의 말 없는(?) 말 한마디가 내 삶의 줄기가 되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거실과 관련하여 <아버지>에 대한 연관어가 공개된 적이 있다.  1위가 ‘나가다’로 17.1% 가장 높았고 14. 4%가 ‘TV’ 2위다.  그다음이 거실에 ‘앉다, 계시다’였는데 역시 상위권에 들었다.  이어 ‘힘들다, 모른다, 무섭다, 싸운다.’가 잇따라 10위권에 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싫고 무섭고 부담되는 존재’란 말이다.

 

반면 엄마에 대한 연관어는 어떻게 다를까? 1위는 ‘놀다’, 2위는 ‘아침’ 그리고 3위는 ‘이야기’였다. 예상대로 이외의 답변에도 ‘눕다, 대화하다. 웃다’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가 주로 나왔다. 이 조사는 LG CNS에서 6개월치, 무려 1억 건의 소셜 데이터를 검색한 결과다. (중앙일보2015.4.9)

 

옛 어르신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남편과 아버지는 방 안에서 기침만 해도 되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공감>과 <소통>이 화두가 되다보니 제대로 <말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아버지는 자기의 아버지로부터 가족과 다정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법을 보고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가장으로서는 과묵하게, 직장에서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법'을 몸으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말을 다정하게 못하고, 안한다고 해서 설 자리까지 위협하지는 말아야 한다.  못하면 가족들이 먼저 다가가서 도우면 된다.  안하면 왜 안하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다정히 물어보는 것부터 우선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말로 인정할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역할로 존중해야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안개 패랭이처럼 작은 꽃을 보지 말고 힘찬 줄기를 보자.  모든 꽃은 줄기가 바로 서야 비로소 피울 수 있다.  ©이지수

*26년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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