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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어느만큼 익어야 맛이 난다.
홍어 역시 오래 삭혀야 제맛이다.

여러날 묵히면 感이 뚝 떨어지는 게 있다. 산행기록이다.
담양 추월산을 다녀온게 언제였나? 2월 1일이다.
꼬박 한달을 묵혀 산길을 더듬자니 흐릿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업무가 바빠서이고
실토하자면 게을러진 탓이다

사무실서 내다보이는 창밖은 봄기운이 살랑대는데
찍어온 사진 폴더를 열어보니 한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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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月山은 전남 담양군과 전북 순창군을 가로지르는 산이다.
담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암릉에 서면
‘아! 이래서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렸구나’ 싶을만큼
사계에 걸쳐 산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산객을 실은 버스가 힘겹게 산구비를 돌아 올라 멈춰 선 곳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사법연수원 가인연수관’ 앞마당이다.
이 연수관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이곳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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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산골짝에 덩그러니 들어선 현대식 건물이
주변 자연 풍광과 그리 조화롭진 않아 보인다.

연수관 관리인이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라?”
“서울에서 왔습니다”
관리인은 고갤 갸우뚱거리며 웅얼거린다.
“서울에도 좋은 산 많을텐디 워째 여까지 왔당가~”

희끗한 산자락을 올려다 봤다.
산길은 들머리서부터 가파르게 올라 붙어 있다.
초입부터 된통 빡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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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산삼거리 능선에 이르러 걸음을 멈춰 섰다.
잔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색이 시리도록 파랗다.
귀까지 내려 쓴 방한용 비니를 말아 올렸다.
턱끝까지 당겨 올린 재킷의 지퍼도 열어젖혔다.
머리에서, 가슴팍에서 김이 폴폴 난다.
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목젖을 적신 후,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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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산 정상은 등산지도 상에 ‘깃대봉(710m)’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상으로 볼때 오름길을 따라 100여 미터만 진행하면 깃대봉인데,
깃대봉을 오간 발자국은 없고 나뭇가지 그림자만 눈밭에
길게 드러누웠다. 발자국은 살짝 우회해 나 있다.
모두들 추월산 방향을 가리키는 팻말에 착실히 따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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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따라 南쪽으로 오르내리길 거듭, 안부(鞍部)로 내려서니
‘견양동 정상(692m)’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다.
왜 ‘頂上’이라 붙여 놓았을까? 분명 능선상의 ‘鞍部’인데…
(안부,鞍部: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
(정상,頂上: 산의 맨 꼭대기)

팻말에 바짝 다가서서 견양동마을로 이어지는 왼쪽 비탈길을 살펴 봤다.
쌓인 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아찔한 급경사 구간이다.
산객이 오르내린 흔적이 없다.

좀 더 진행하니 이번엔 또 복리암 정상(684 m) 팻말이다.
이곳 역시 왼쪽으로 내려서면 복리암 마을로 통하는 삼거리일 뿐,
‘정상’을 갖다붙이기엔 맞지 않아 보인다.
뭐 괜히 갖다붙인 건 아닐테고…그냥 궁금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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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에 자릴 펴고서 飯과 酒로 방전된 체력을 충전했다.
로프를 거머쥔 손아귀에 힘이 실리고 종아리 근육이 불끈한다.
만땅?충전에 대한 몸의 충실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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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능선에 올라서니 수리봉(723m).
가야 할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담양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걸어 온 능선길을 돌아 보니 그새 아득히 물러나 있다.
그 끄트머리에 들머리서 만난 ‘가인연수관’이 가물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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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기대 선 수리봉 정상 팻말엔 추월산 1.7km를 가리킨다.
이곳 산길에서 만난 팻말 중 거리 표시가 없는게 더 많다.
가끔 거리가 표시된 별도의 아크릴판이 팻말에 매달려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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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에 담양 추월산을 품다


월계삼거리 팻말(추월산정상 0.35 km)을 지난다.
완만한 산자락엔 쌓인 눈이 그대로다.
그러나 길은 이내 로프가 걸린 암릉으로 이어진다.
이는 정상이 가까왔음을 알려주는 전조이기도 하다.

겨울 끝자락에 담양 추월산을 품다


추월산 정상에 섰다.
담양호 건너 강천산이 손짓하고 서북쪽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과
동쪽 저멀리 소잔등을 닮은 무등산도 아스라이 가물댄다.
가을밤에 이 산을 올려다 보면 암봉이 달에 닿을 듯
높아 보인다고 하여 ‘秋月(추월)’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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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 정상에 세워진 표시석은 토르소(torso)를 닮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해발 731m인가, 썩 내키지지 않는다.
과거 극악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731부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일 총리 ‘아베’는 대놓고 ‘731’이 새겨진 전투기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숫자를 이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731’이 싫다. 1m를 깎아 730m로 표기하고 싶다.

추월산 정상부는 진행방향에서 오른쪽 3분 거리에 살짝 비껴나 있다.
호남정맥은 추월산 정상을 기점으로 남서쪽 ‘밀재’로 고도를 낮췄다가
내장산과 백암산을 일으켜 세우며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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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대봉에서 수리봉 거쳐 이곳까지, 잠깐이지만 동행한
호남정맥과 별리하고 南東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리암 상봉 방향이다.

추월산에서 보리암 정상 가는 산길은 군데군데 로프가 걸린
암릉이 있긴 하나 대체로 수월하다.

헬기장을 지나고, 무인 산불 감시시스템을 지나 산죽 무성한
편안한 산길을 걷다가 로프 잡고 암릉 올라서니
추월산 능선의 막다른 봉우리, 보리암 정상(69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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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내려다 본 호수면은 장판처럼 잔잔하다.
보리암 산자락을 삼켜버린 산그림자는 담양호에 발을 담그고,
호수 건너, 잔설을 인 산들은 첩첩이 하늘금을 잇고 있다.

겨울 끝자락에 담양 추월산을 품다


보리암 정상에서 담양호 방향으로 내려서는 초입에 시야가 좋은
데크가 있다. 담양호의 조망이 일품인 포토존이다.
여기서부터 급사면이다. 고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다행히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내려 설수 있다.
날머리인 산아래 주차장까진 1.4k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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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서면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벼랑끝에 제비집처럼
올라앉은 암자가 눈에 든다.
고려 때 보조국사가 건축하였다는 ‘보리암(菩提庵)이다.
관악산 ‘연주대’만큼이나 아찔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쫓기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치욕을 피하기 위해 투신한 곳으로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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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 갈림길을 지나 제2등산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는 동안
산그림자는 이미 담양호 마저 삼켜 버리고 건너편 산자락을 넘보고 있다.

산골짝의 해는 짧다. 으스스 한기가 재킷 속으로 스민다.
매운탕에 소주 한잔 생각에 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암봉에 걸린 가을밤의 달을 상상하며…
겨울 끝자락에 담양 추월산을 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