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마시고 취하고




요즘, 감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으며 밑줄을 치면서 웃을 수 있고 울 수도 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그 분의 얼굴을 상상하며 보고 싶어진다. 그 작가와 소주 한 잔 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과 똑 같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세심하고 철저하고 명확하게 책의 가치와 글의 의미를 잘 표현할 수 있다니? 표현은 못해도 그런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같은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대학원 동문들끼리 일본 연수를 갔다가 후쿠오카에 있는 조총련 소속 재일조선초급학교를 방문했다. 엄청난 규모의 교정에 단 100명도 안 되는 학생들이 남루한 옷을 입고 낡은 필기구를 갖고 썰렁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을 둘러보니 대부분 일본 책이었고, 북한 서적이 십여 권 꽂혀 있었다. 남한의 책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덜컥 말을 꺼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자 마자 책을 보내드릴게요.”

그 학교를 나오자 마자, 귀국하면서 집에 들어 올 때까지 걱정과 근심이 앞섰다. 무슨 재주로, 얼마나 되는 책을 그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대학원 동문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문자를 보내고, 회의를 소집하고, 책 없는 사람은 돈을 내라고 하고, 한달 만에 천여 권의 책이 모아졌다.

더 많이 보내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일단 보내는 게 중요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약속을 잊었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환경에서 북한 책을 읽고 있는 어린 꼬마들의 얼굴을 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 일본에서 조선초급학교 손ΟΟ 주임으로부터 고맙다는 내용의 e-mail이 왔다. 책이 너무 많이 와서 일본 곳곳에 있는 학교들과 나누어 보겠단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세계적으로 화려한 환락의 도시 라스 베가스에 잠시 머물 때가 있었다. 휴일만 되면 차를 끌고 인근의 네바다 사막을 달리고, 조금 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까지 돌아 다녔다.

어느 날, 모처럼 시내를 돌아 다니다가 큼직한 서점에 들렀다. 그 안에 있는 책을 모두 사고 싶었지만, 바겐세일을 한다는 책 바구니만 뒤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1,400 쪽이 넘는 양장의 두꺼운 책 한 권을 찾았다. 80여 년 전에 나폴레옹 힐이 쓴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 54쇄 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유명한 책일까? 숙소로 돌아오자 마자 서문부터 읽기 시작하여 한 달 만에 거의 반을 읽었다.

귀국하여 일년 동안 두 번이나 읽고 요약하여, 서너 번 강의도 했다. 그 책 후반부에 “나는 멋진 강사가 될 것이다. (I am going to become a powerful public speaker.)”라는 글을 읽고 밑줄을 그었다. 2만원도 되지 않는 책으로 몇 억원이 넘는 가치를 발견했다.



엊그제 설날 저녁에 새 사위가 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재롱을 떠는 딸의 눈치를 보던 아들이 문득 한 잔을 제안한다. 술 사러 나가려는 아들에게 사위랑 말동무나 되라 하고, 얼씨구나 좋아 외투를 걸쳐 입고 맥주를 사러 나갔다. 당연히 다양한 종류로 한 바구니를 들고 들어 오니 아내는 벌써 오징어와 북어를 구워 놓고 과자도 몇 봉지를 뜯어 놓고 사과와 배도 푸짐하게 까 놓았다.

이걸 다 마시고 먹으려면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 보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졸음이 몰려와 먼저 들어 와 자는 척 하다가 잠이 들었다.



요즘도 종종 술 생각이 난다.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좀 멀기는 하지만, 애써 찾아간 순대국밥 집에서 특별히 주문한 안주와 함께 마시는 반주는 인생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한다. 그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와 책상에 앉으면 못할 일이 없다. 아들이나 아버지와 마시는 술은 취하질 않는다. 몸은 비틀거려도 마음은 꼿꼿하다.

약간의 취기가 느껴질 때, 막스 부르흐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온 몸에 애잔한 희열이 느껴진다. 브람스 교향곡이나 차이콮스키의 비창은 소주가 어울리고, 베토벤과 쇼팽의 피아노협주곡은 와인이 제격이다. 장사익과 조용필의 노래는 막걸리가 안성맞춤이다. 물론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푸른 벌판에서 춤추며 맥주를 마셔야 어울린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해 본 적은 없다.

설날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 새벽에 글을 쓰면서 부르흐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듣는다. 약간의 한 잔이 땡기지만 참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