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으로 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당시 반 친구들을 모아 담임교사였던 은사님을 찾아 뵙자는 게 요지였다. 더구나 15일이‘스승이 날’ 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분위기를 잡는다.

20여년이지난 반 친구들의 연락처를 들쑤신 그때 그 시절 반장이라는 녀석의 요란한 설레발에도 고작 3명의 방문단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더 쑥스러운 것은 그 이후부터 였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 되었던 선생님의 표정, 세월이 훑고 지나간 서로의 주름 앞에 견우와 직녀보다 훨씬 못한 주기로 이제 끔 얼굴을 마주함이 선거 때만 민심을 살피 겠다며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는 후보자 심정과 같아서 돌아오는 내내 찜찜했다. 평소 그 흔한 전화나 문자 한통 없이 내도록 선생님의 은혜를 방치하다가 스승의 날만 생색내며 챙긴 쇼맨십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도 찾지 않는 것보다 낫고 그나마 이런 기념일이 있으니까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만일 우리처럼 이런 일회성 기념일 챙기기 활동이 이미 보편화 되었다면 차라리 그 기념일은 없애 버렸으면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념일은 정말 기념비적인 역사의 사건이나 교훈 또는 시사점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어느 한정된 시점으로만 정의하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어버이 날이나 스승의 날 처럼 해당 기념일이 지속적이고 당위의 행동을 원하는 것이라면 일회성 날짜 보다는 강조기간을 설정하여 권고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마땅히 자식과 제자된 도리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인데 어느 특정한 날짜만 강조한 들 앞의 우리반 3인조 방문단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특별히 그날만은 쉬면서 까지 챙기라는 공휴일 지정도 아니지 않는가?(다행히 올해는 토요일이었지만)

시대를 거슬러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기념일 또한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우절이다. 인심 좋고 순박한 시절에나 한껏 기분 좋은 거짓말을 해보라는 취지로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만우절 이지만 오늘날은 부작용만 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또 거짓말을 하라는 만우절은 웬지 어이없다. 그러지 말고 오히려 그날만큼은 제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진실절’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과거의 국민 계몽과 정서적 가치 고양을 위해 제정한 기념일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할 때다. 이제껏 우리가 지정한 기념일이 올바르게 시행되어 정착되고 있는지도 파악해 보아야 한다.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우리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은 스승의 날 선물을 고민하게 만들고 뼈아픈 교훈의 6.25전쟁이나 위대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과 거룩한 쾌거의 한글 창제일 보다는 대륙 넘어, 바다 넘어온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 등에만 더 관심이 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한술 더 떠서 다른 의미 있는 기념일은 대충 넘어가면서 발렌타인데이, 빼빼로 데이 등 상술과 오락의 기념일은 연인들의 사활을 건 기념일이 되어 버렸다.

기념일을 통해 삶의 변화를 느끼고 역사와 시간을 되돌아 보는 것은 분명 기념일의 순기능으로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우려내어 먹고 버리는 우롱차와 같은 역기능적 기념일은 견제 해야 한다.

그저 그 때만 반짝했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사라지는 기념일, 일부 오용과 부작용이 우려되는 기념일, 상업주의에 물들은 기념일, 우리 것 소중한 줄 모르고 여과없이 받아들인 무분별한 이국적 기념일에게는 감히 안녕을 선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