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바이어위주로 진행하자
무슨 일이든 바이어위주로 진행하자
한동안 바이어와 소원했던 적이 있다. 뭔 일을 해도 잘 진행되지 않고 이메일을 보내도 회신도 별로 없고, 그 쪽에서 보내도 이 쪽에서 시큰둥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양말에 대한 주문은 오고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이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다. 최근에 보낸 양말에 대한 수량과 색상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 리가 없다면서 다시 보았다. 내 쪽에서는 이상이 없었는 데, 핀란드의 바이어가 색상과 수량을 애초부터 잘못적은 채로 거래 상대방과 계약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바로 핀란드에서 꽤 큰 백화점이고, 계약조건에는 계약불이행시 벌금(penalty)를 물게 되어있었던 모양이다. 그리 많지 않은 수량인데다 색상도 까다로운 것들의 조합이었다. 아무리 계산해도 그 수량을 만들어 보내봤자 내가 손해를 보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수량을 만들어 보냈다. 평상시같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핀란드쪽의 담당자와 책임자가 바뀌면서 그간의 업부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서로가 애를 쓴 탓에 무사히 일이 끝나기는 했지만, 이 일은 그 쪽이나 내 쪽이나 상당한 교훈을 주었다. 우선 핀란드는 이 번일로 인하여 실무적인 업무진행의 애로사항을 상당부분 이해하게 되었고, 나로서는 바이어의 바이어가 상당히 매서움을 알게 되었다.



장사를 하다보면 자기 공급망과 구매망의 관리 (SCM – Supply chain management)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자기의 바이어위에 또 다른 바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나로 그랬었다. 그래서 바이어가 클레임을 걸면 우선 몸부터 사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수출자로서 갖는 많은 혜택중의 하나가 한국에서는 내가 바이어로서의 위치를 누린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에 있는 셈이다. 그 먹이사슬을 핀란드에서 펼쳐보면 거꾸로 나의 바이어는 먹이사슬의 최하위층에 위치하게 된다. 핀란드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수입업자 -> 대도매상 -> 도소매상이라는 유통망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수입업자는 항상 대도매상이나 도소매상에게는 판매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바이어는 그들로부터 주문을 받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그로부터 주문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나는 그들의 노력결과에 따라 나의 성공과 실패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한국에서 내가 해야 할 노력을 그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야 하고, 모든 일은 바이어위주로 해야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수출자는 적어도 두 가지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업무 절차는 서류에 의하여 진행하고, 또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바이어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외국사람에게 한국사람의 특징을 꼽으라면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대충과 빨리빨리’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변동사항이 있으면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언제나 바이어의 동의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거래를 했어도 바다 멀리 떨어져있고 문화가 다른 외국사람이 우리의 마음과 행동방식을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될 확률이 매우 높다. 아무리 선의적인 것이라도 우선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한다’는 오해를 부르지 않는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 거야’라든가, ‘이건 소소한 일이니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 ‘이건 너무 급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되’라면서 내가 먼저 결정을 내리고 한참 뒤에 알려주거나, 물건을 받아보니 실제로 이전부터 해왔던 것과 다를 때 상대는 배신감내지는 파트너십의 균열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나역시 공장에서 일을 그렇게 진행하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여러번 표현한 적이 있었다.



‘대충대충, 빨리빨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서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일도 그렇다. 핀란드에서도 분명 뭔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대충하다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 나역시도 처음에는 그런 일들이 몇 번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쪽에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별 손해없이 해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나역시 대충대충 빨리하기는 하지만 큰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은 일단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나의 생각을 말해주거나, 잘못되도 바로 상대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미 12년동안 해왔던 일의 패턴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은 문서로 한다는 점이다. 일단 우리의 일은 계약서가 있다. 그 계약서에 근거하고, 뭔가 변화가 있을 때는 꼭 단 한줄이라도 이메일로 보낸다. 그러니까 아무리 대충하고 빨리하더라도 크게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처럼 바이어가 잘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도 사람이니까. 그럴 때도 과정상의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더라도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하는게 우선 순위이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바이어가 바이어의 바이어로부터 받을 수 있는 주문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정작 내가 잘못했을 때 편의적인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판매자는 구매자가 있어야 한다. 그건 수출이나 내수나 차이가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바이어의 일이 잘 진행되어야 내 일이 잘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편리함보다는 바이어의 편리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진 : 연합뉴스 20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