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는 불평등을 극복할 수있을까?
난 왜 재벌집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난 왜 우즈처럼 골프를 잘하지 못할까?

난 왜 서울대 박사들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할까?



세상은 참 여러모로 불공평하다. 그런데 정말 불공평한 것을 느낄 때는 내가 사회의 시스템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을 받을 때이다. 그럭저럭 먹고 살때는 나보다 위에서 사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할 지언정, 내가 있는 위치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항상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들로부터 외면당할 때이다.



그런 불공평에 대한 감정을 가장 강하게 느낄 때는 신분이 상승하강을 할 때 더욱 그렇다. 애초부터 떨어져있을 때나, 올라가 있을 때는 어쩌면 평등이라는 개념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분의 상승하강을 겪다보면 ‘아, 사회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완벽하지는 않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는 그런 신분의 상승하강을 세 번정도 겪었다. 그런데 차라리 올라간 자리에 계속있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올라가지 않은 자리에서 계속있었다면 그런 사회적 불평등이나 사회 시스템의 불완정성에 대하여 무덤덤할 수있을 것이다. 그냥 살던대로 살면 그게 익숙하니 불편하지 않을테니까. 그런데 일단 내가 속했던 곳이라는 사회의 시스템에서 어느 날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불안감과 함께 느껴지는 사회에 대한 야속함은 당해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그리고 ‘왜 난 능력이 되지 않아서 그 속에서 더 잘나가지 못했을까?’라는 자괴감이 들면서 열등의식마저 내 의식속에 박히게 된다. 내가 그런 것을 사업을 하면서 두 번 경험하였는 데 우선 처음에 자동차부품의 사업이 실패하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때였다. 도무지 막막한 나날들. 무언가를 하고자 하여도 할 것이 없을 때였다. 그럴 때는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리도 없다. 무언가를 할 수있을 때에 도와달라고 하겠지만, 내가 정말 어려울 때는 도움을 받기마저 신통치않아진다. 세상은 의욕이 있건 없건간에 자기의 능력만큼만 도와준다. 그러니까 능력이 많을수록 남들에게 도움을 받을 기회가 많아진다. 그리고 그 능력은 전문적인 능력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자금력에 따르는 경우가 더 많다. 나같은 경우도 수중에 가진 돈도 없고.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새로운 것을 해보라고 하고, 실제로 괜찮은 기회가 될 것같은데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사업이란 기본적으로 자금이 있어야 하는 데, 그게 없으면 기본적으로 투자가 되지 않고 그러면 그 일은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더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어찌어찌 겪고 나서 제법 자리를 잡아간다고 하다가 다시 중국 때문에 어려워졌다. 그리고 난 또다시 새로운 불평등을 확실하게 경험한다. 가장 최근에 경험했을 때는 정말 화가 나서 우리나라의 금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금융감독원에 가서 민원을 넣기도 하였다. 열심히 돈을 쓰다가 갑자기 돈줄이 콱 막히면 금융시스템의 불합리함에 대하여 정말 실감하게 된다. 돈이 없는 데 자꾸만 연체료를 매기고, 가산금을 물리고, 이자율을 높이고, 더 많은 원금을 갚으라고 하고, 게다가 나하고 상관이 없던 은행들까지 나의 거래를 막아버리고 ……. 그러면서 재기의 발판을 자꾸만 걷어차고 없애버리는 심술꾼에다가 그야말로 부자에게는 더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가난한 이에게는 오히려 있는 쪽박마저 깨버리는 사회 불평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게 지금의 금융시스템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하였다. 누군가는 그런 나의 생각에 대해 ‘사회는 이긴 자가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럼 누가 이긴 자이지? 지금은 혁명의 시대도 아닌데?

지금의 사회는 ‘이긴 자와 진 자’를 구별할 수 있는 변혁기가 아닌,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사회이다. 다만, 그 정체된 흐름을 거부하는 일부 무식하고 용감한 ‘기업가’들 정도만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고 볼 수있다. 그리고 그들이야 말로 이 사회의 불평등을 실감하고 있으면서도, 그 장애물들을 넘어서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고 볼 수있다. 실제로도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한 사례가 가장 많이 내놓는 사람들은 바로 기업가들이다. 일단 처음부터 부자인 사람들은 성공사례가 되지 않거나, 설령 부자였더라도 대체로 한두번정도의 실패를 겪은 다음에 성공모범 사례로 사회에 소개되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게이치가 쓴 ‘머리좋은 사람이 돈 못버는 이유’에서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일단 창업을 했으면 그 때부터는 다른 회사와 대등하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일하면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상식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두려 한다. …….. 대표적인 것이, 비즈니스에서는 회사의 격이나 실적이 큰 의미를 갖는 다는 생각이다. ……. 규모가 작은 회사는 큰 회사를 이길 수없다는 것 또한 잘못된 상식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장에서는 오히려 규모가 작아야 성공하기 때문이다.”



아미티아 센은 그의 저서인 ‘불평등의 재검토’에서 “평등이념은 1) 인간의 기본적인 이질성과 2) 평등을 판단할 수 있는 변수들의 다원성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다양성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두 가지 다양성, 특히 양자의 관계를 문제삼는다. 인간의 이질성은 변수마다 평등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만든다. 바로 이 것 때문에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라는 중심문제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도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닌데다가, 그 사람에 처한 상황에 따라 평등의 개념을 잡아보자는 이야기이다. 돌이켜 보면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상당한 불평등인데, 시스템적으로 보면 그 것도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모두가 가장 잘 이해하는 교육시스템으로 보자.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평준화시절이라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집이 부자건, 가난하건, 다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이다. 그러면서 서로 자극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면서 같이 커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부잘하고, 집안이 좋은 사람의 자식들만 따로 모아서 자라지는 않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애초부터 동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엘리트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낙오자로 인정받는 시스템이다. 누가 ‘뛰어난 아이는 뛰어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마다, 그 뛰어남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라고 묻고 싶다. 사실 인문계쪽의 뛰어남은 어렸을 때의 천재성을 말하기 보다는 나이들어가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분야이다. 문학, 철학, 사회학등등. 어려서의 천재성과 상관없이, 나이들어서 빛을 발하는 사람들은 주로 문과계이다. 이에 반하여 이과계는 아인슈타인처럼 20대의 업적으로 평생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재성이 중요하다. 나같은 경우는 모든 아이들이 서울대 박사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게 불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매우 편협한 계층만을 알면서 자라게 되는게 불만이다.

왜냐하면 공부잘하는 아이나, 춤잘주는 아이나, 기계를 잘만지는 아이나 구별없이 섞여서 살다보면 서로 자극하고, 융합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서로를 이해할텐데 지금은 그게 아닌 게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고, 정말 똑똑하고 창의적인 아이들이 붕어빵 찍어내듯이 하는 평준화 교육으로는 오히려 아이들의 발전성을 저해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처럼 교육제도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열마디이상은 할 수있을 정도이지만, 딱히나 모두를 만족시키는 제도를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제도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이라는 사회가 외국의 다른 어떤 사회보다 ‘굉장히 합리적’이다. 비교적 적은 부정부패(미국의 엔론을 보자), 비교적 평등한 사회(아직도 왕이 있는 영국을 보자), 비교적 인간적인 사회 (국가는 부유하지만, 국민은 가난한 일본에 비하면). 내가 아는 한 한국사람은 분명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시스템안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 가도 한국처럼 깨끗하거나 안전하거나 민첩하지 못하다. 한국의 시스템을 하나하나 따로보면 각 시스템의 점수는 60점일지라도, 전체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놓은 전체 점수를 따진다면 여전히 60점일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비교하는 선진국들은 50점도 안되는 나라가 태반이 넘을 것이다. 특히 서구유럽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만 못한 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그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사업가는 그런 불평등의 변화를 매우 심하게 겪게 된다. 잘되면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는 가장 편한 시스템이지만, 어느 순간은 한강다리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보게 하는 것도 그 시스템이다. 그래서 항상 그 불평등함을 내 친구로 만들고 나를 위해서는 칼을 들이대지 않고, 남에게는 너무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평등을 그 자체를 과대평가하다 보면 결국 ‘언제나 대기업의 횡포,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소비자의 습성’만을 탓하고 발전을 못하게 된다.



이 세상에 일상화된 불평등은 사업을 하는 데 일상적으로 극복해야 할 요소이지, 절대적인 넘지 못할 벽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