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물리학, 기초과학인가 상품공학인가?



물리학, 기초과학인가 상품공학인가? (2)
사진 : http://neoskin.tistory.com/2838



나) 과학과 현대 산업



아무리 과학이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기가 어렵다하여도 그들이 상아탑에서 연구를 할 수만 있다면, 순수 과학에 헌신할 수 있는 학자들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들을 현실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아마도 상아탑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선진국 대부분이 기술이전에 인색해지고 있고, 연구개발에 대한 보조금 및 지적 재산권에 대한 국제 규제가 심해지는 등 기술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갈 수록 악화되고, 새로운 경쟁우위요소로서의 기술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현대의 제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전자제품은 양자학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개발자체가 어렵다. 반도체는 전자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양자물리학이 이용되는 최첨단의 한부분이다. 생명공학은 생물학이 공학화 된 부분이다. 하지만 기업이나 국가는 기초과학이 ‘진리의 탐구’라는 고상한 의무를 인정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너무 많아,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먼저 따져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연구비를 지불할 때에도 산업화, 상품화의 가능성부터 점쳐보고 준다.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상품화 되지 않은 과학적 성과는 무의미하며, 그 들은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심오한 원리를 찾기보다는 상품화를 염두에 두고 소비자의 구미를 끌만한 제품의 생산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재료를 찾아야만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있다. 과학자로서는 학문적 한계와 더불어 사회적인 의무의 덫에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과학이 과학 기술과 합쳐지고, 그 결과가 상품화되면서 우리는 한 때 유토피아의 도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과학과 지식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어둠에 빠지고, 알 수도 없는 환상 속을 살아가게 되는 것같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현실 검증에 문제를 갖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들이 ‘현실감 상실’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 것은 가끔 아무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변치않는 진리는 ‘인간은 땅을 밟고 사는 동물이다’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동물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로 바뀌어야 할 것같다. 컴퓨터를 하면서, 인터넷을 하면서, T.V를 보면서, 핸드폰을 하는 등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세계를 따져본다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간중의 절반 이상이 될 것이다.



생명의 복제가 가능해짐에 따라 ‘인간은 무엇인가? 신의 창조물인가, 단세포에서 진화된 동물인가?’에 관한 본질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면, 가상의 세계를 불러온 정보통신 공학의 발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집단 속에서 태어나 여러 집단에 소속되고 여러 집단을 형성하면서 그 생애의 궤적(軌跡)을 그려나간다. 그런데 가족 ·소꿉동무 ·학교 ·친구 ·회사 ·단체 등의 직접 접촉을 전제로 하는 사회가 아닌, 가상 공동체라고 할 때도 이런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가상 공동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실용화되도 1-2년이 지난 후이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아마도 97년부터이다. 내 기억으로 내가 홈 페이지를 처음 만든 것이 97년도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대단히 생소하였던 인터넷은 불과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인류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인터넷이 이제 또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하고있다. 선이 사라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otous).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좀더 명확하게 하자면,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재(全在)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야 말로 신에게나 해당하는 단어이다. 우리가 실제로 어디 있것간에 알고자 하는 것을 인터넷이나 무선 통신망을 통하여 알아낼 수있고, 또한 그 결과를 실행할 수있다는 의미이다. 본래의 의미를 과장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우리 생활에 행해지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등산을 하고 있는 나는 지금도 핸드폰으로 은행의 계좌 잔고를 알 수있고, 또 송금할 수있다. 앞으로는 더 무한한 일을 할 수있다고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진부하다. 다시 한번 메칼프의 법칙과 무어의 법칙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그로 인한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을 우리 주위에서 돌아보자. 그런데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제품들은 이미 오래 전에(어쩌면 2-3년전)에 개발되어 구닥다리가 금방 되어버릴 것들이 많다. 흔히 전자제품을 살 때는 비록 비싸더라도 최신을 것을 살려고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금방 유행에 뒤진 제품이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재 사무실에서 쓰는 인터넷의 전송속도는 1기가가 넘는 영화를 무리없이 다운받으면서 볼 정도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초당 1페타비트(1,000조비트, 2003년도의 인터넷 회선 전체를 이용하면 꼬박 하루를 걸리는 정보의 양)가 되는 회선이 사무실에 들어올 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2000년도 초반에 개발되어 있다. 어쩌면 회선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 광섬유는 유리로 정보를 둘러싸 확산을 막지만, 공기로 정보를 둘러싸 확산을 막아 빛으로 보내는 무선 광통신 기술도 이미 개발이 되었다고 한다. 조지 길더는 휴대전화로 대표되는 정보 단말기 성능이 점점 향상되면서 단순한 통신 기기가 아닌 컴퓨터 기능까지 겸하는 텔레퓨터로 진화해가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혜택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기술들에 비하면 대단히 초보단계라고 할 수있다. 기업은 보다 진보된 과학과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기술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낸다. 무어의 법칙과 메칼프의 법칙에 목이 메어있는 기업들은 남보다 더 빨리 신제품을 내야만 한다. 이미 무한한 속도 경쟁은 마치 100M경주의 종반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핸드 폰의 신제품 개발 주기가 불과 3개월이내라는 것은, 마치 소비자라는 기수를 태우고 경마장에서 채찍질을 맞으며 달리는 기업의 모습을 보는 것같다. 3.5개월이면 이미 경쟁에서 뒤쳐진다. 그렇지만 이제는 과학자들이나 기업의 마켓터들도 상상력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같다. 마치 과학이 더 이상 심오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여, 현실로 다가왔지만, 이제 상품의 세계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들은 더 이상 전화, 텔레비전, 재봉기계, 배, 비행기같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보다는 기존 제품들의 성능 향상이나, 기능의 통합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디지털 컨버젼스라고 부르는 제품들에 새로운 성능이 들어가는 제품을 보았는 가? 냉장고에 인터넷을 붙이고, 핸드 폰에 카메라를 붙이고, MP3에 녹음기를 붙이고…… 다만, 본래는 다른 제품의 기능을 추가하고, 더 빨라지고, 작아지고, 가격이 저렴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제 물리학과 생물학의 순수 과학에서 파생된 상품과학과 생명공학도 마찬가지로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 과학의 분야에서 찾아야 할 원리를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듯이, 상품에서도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물건을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 것같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나오는 제품들은 컨버젼스(복합기능)을 강조하지만, 새로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의 주먹구구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냈던 혁신적 발명가들의 제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자들의 손을 거친 모든 제품은 스크린이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손가락만한 MP3에는 수십가지의 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스크린이 있고, 시계에도 아날로그식 바늘에 세계시간, 일자, 깨우기 기능, 일정을 상기시켜주는 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스크린이 달려있다. 수백명의 박사들이 수조원의 돈을 들여서 만드는 인터넷 연관제품과 스크린 연관제품은 인간의 삶을 현실세계에서 밀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준다. 이미 극장에서 본 영화를 실감나게 다시보기 위하여 길이가 1m가 텔레비전에 또 수백만원이 넘는 홈 시어터를 별도로 구입해야 할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만은, 이미 시장에서 웬만큼 팔리는 제품이 되어있다.



그 스크린 속으로 우리는 달려들어 가고있다. 이제 물질적인 것의 가치는 적어지고, 정신적인 것의 가치가 더 커져가고 있다.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생산적인 면에서 보면, 바로 ‘아이디어’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것은 창고에 넣어둘 수도 없고, 일단 남에게 알려지면 내 것도 아니다. 빠른 시일내에 스크린에 올려야만 비로소 남에게 내 것이라고 잠시나마 인정을 받는 것이다. 육체는 이제 정신에서 분리되었다. 하지만, 육체의 반응 체계는 여전히 원시시대를 간직하고 있다. 원시시대 갑작스러운 아드레날린의 분출은 적 또는 사냥감과 맞서 싸우게 하거나 도망치도록 반사신경에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인간은 상황을 판단해서 싸우거나 도망을 친다. 그런데 이 아드레날린은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도 분비된다. 하지만 적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 도망가거나 싸울 수없다. 다만, 스트레스를 강화시킬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구속이 사라진 곳, 육체적. 물질적 구체성은 사라지고, 정신만이 남아있는 곳.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아직도 물질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 부조화를 이룬다. 끊임없는 정신적 자극은 코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키지만, 육체적 반응이 따르지 않아, 뇌에만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게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일종의 정신적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중 누구도 지금 사는 곳으로 이렇게 빨리 그리고 전격적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기존의 ‘능력의 사이클’ 밖으로 벗어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적 충격과 육체적 타격을 받고있다.문제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모든 내면적 속끊임은 우리 삶에서 광기를 유발하는 매커니즘을 가속시킨다. 그리고 그 것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뿌리깊은 공통점인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모두 약간씩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진화를 쓴 멜린다 데이비스는 이를 ‘현대적 광기의 공유상태’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속적인 정신불안정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축적된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십대의 청소년은 컴퓨터로 숙제를 하면서, 동시에 음악을 듣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인스턴트 메시징을 통해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 결국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위안의 첫 단계는 평화와 조용함 속에서가 아니고, 전자 스크린의 자극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분노의 폭발은 우발적인 개인적의 폭발로 난폭운전, 사업장 내에서의 증가되는 폭력등을 들 수 있으며, 또 다른 특이한 형태의 집단적 분노는 ‘분노의 아마조아니즘(Raging amazonianism –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상과 그와 관련된 문화적 흐름)이다. 교활함. 섹시함과 남자못지 않은 근육질로 거친 행동과 분노로 무장한 강한 여성의 모습은 섹시 헤로인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치유를 받아야 할 상태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의사에게 가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아무도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가상의 세계로 진입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현재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가는 신세계’로의 과정인 데, 이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강박증이라고 타박을 한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아주 훌륭한 치유자를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판매자(마켓터)’이다. 치유자로서 판매자, 이 탁월하면서도 재미있는 개념을 발굴해낸 멜린다 데이비스에게 찬사를 보낸다.



삶은 이제 현실을 떠나 가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