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개의 명품을 지니고 있으면 괜히 뿌듯하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게 사실이다. 명품이 꼭 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티를 내지 않는 상징물이 되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명품이 한낱 꿈과 사치가 아닐진대 이제 가난하다고 명품을 걸치지 못할 이유 또한 전혀없다.
부자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품으로 휘두른 부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도록 비록 가난하지만 한 두개의 명품을 소지해 보자. 같은 명품이라도 부자가 지닌 명품과 가난한 자가 지닌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희소성 면에서 부자들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기에 명품 자체에 대한 특별한 정(?) 또한 분산 될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은 힘들게 손에 얻은 명품이기에 애지중지 할 수밖에 없다. 명품의 입장에서도 부자들의 품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것보다 가난한 자에게 위탁되는 편이 훨씬 나을 듯하다. 맘만 먹으면 하루에도 수 십개의 명품을 사서 몇 달 쓰다가 싫증내는 부자동네로 간 명품지갑은 결국 토사구팽(兎狗烹)의 서러움을 체험하지만 죽도록 몇 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산 어느 가난한 대학생이 산 명품 지갑은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의 주인의 지극봉양(至極奉養)에 눈물이 절로 나게 된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떤 사람, 어떤 상황,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서 이렇게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니 명품의 의미와 활용도 또한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해도 명품을 소지하여 스스로 부자행세를 해보자. 나도 명품 한 두개는 거뜬히 키울 수 있다는 과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 떳떳한 나 자신의 표현이다.

어린 시절 필자의 집은 눈꼽만큼도 부자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콩나물을 살 때도 몇 번씩 고심하고 값싼 양말 한 컬레를 고를 때도 수십번씩 만져보시는 분이셨다. 구멍 뚫린 양말도 기워 신고 화장지가 아까워 철지난 일력을 잘라 쓰라고 강조했던 어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한 필자를 백화점에 데려가 그 당시 다른 교복보다 두배나 비싼 명품 교복을 사주셨다.(그때는 교복자율화가 되기 이전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기죽지 말라면서…….그 명품 교복이 아직도 생각난다. 지금의 S물산에서 만든 ‘댄디 학생복’이었지 아마…… 노란 단추가 유난히 빛이 났고 가끔씩 쉬는 시간에 교복 단추끼리 힘의 대결을 펼쳤었는데 (단추끼리 맞대고 누르기 게임으로 단추가 찌그러 지면 지는것 )과연 명품 교복 답게 최강 내성까지 탑재한 단추 였던 터라 백전 백승! 뿌듯함이 교실천장을 가로 질렀었지 아마…….

내 휘하에 한 두 개 이상의 명품을 데리고 다녀라. 그러나 그중 필수적인 명품 하나는 유형이 아니라 무형의 명품이었으면 한다. 삼성의 파브, LG 엑스캔버스, 도요타의 렉서스 같은 이름값 명품인 바로 나 자신의 상품가치 명품을 함께 지녔으면 한다.

셀프 브랜드(Self Branding)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자신의 이름만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무형의 명품브랜드를 만들도록 하자. 이는 가난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부자들에게 둘러싸여도 주눅들지 않기 위해 찾는 껍데기 명품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 알짜배기 명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