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악플 더는 방치할 수 없다



출처 : 한경닷컴 > 뉴스 > 사설/칼럼

일자 : 2008년 10월 3일







유명 여배우 최진실씨의 죽음과 관련해 인터넷의 악성 댓글이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정말 충격이다. 최씨의 자살 동기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이른바 ‘악플’로 인해 심한 심적 고통을 겪어온 저간(這間)의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됐듯이,악플이 ‘얼굴 없는 살인무기’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정부 당국은 네티즌들이 익명성에 숨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도록 인터넷 실명제를 확대 실시하고,악플러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제한적 본인확인제’ 강화를 골자(骨子)로 한 정보통신망법 시행령개정안부터 처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티즌들이 불건전한 정보유포를 차단하고 악플러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감시자 역할을 하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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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냉소적 이성비판

저자 : 페터 슬로터다이크



현대의 대중 냉소주의자는 개인적 신랄함을 잃었어도, 공개 진열의 위험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유일무이한 원형으로서 타인의 관심과 조롱에 자신을 노출하기를 포기했다. ‘심술궂은 또렷한 눈초리’를 한 이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잠적해버렸다. 그리고 익명성이 비로소 냉소적 일탈의 본령이 되었다.




현대의 냉소주의자는 사회에 통합된 반사회적 일탈자이며, 무의식적으로는 전혀 환상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히피와도 겨룰 만하다. 그는 자신의 심술궂고 또렷한 시선이 개인적 결함이나 사적으로책임져야 할 비도덕적 변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의 생존방식이 사악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수준을 낮춘 집단적 관점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언제나 바보로만 살지 않겠다는 데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계몽된 인간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행동방식이다.



그 것은 바로 소박성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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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인터넷 시대에 사는 것이 겁난다.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서 인터넷을 모든 변화를 빛의 속도로 바꾸어버렸다. 인터넷 이전만해도 하나의 제품이 나오면 최소한 몇 년은 지탱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항상 변화를 생각하고 빛의 속도로 생각하고 변하지 않으면 않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그 속도에 적응할 수 있을까?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어야 하는 데, 문제는 일부가 아닌 대다수를 도태시키고 있는 속도의 변화가 두렵다.




사회적으로는 지나치게 투명한 사회에서 얼마나 버틸 수있을 까 하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짓고, 신은 인간을 용서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하지만 인터넷은 모든 인간이 성인이기를 강요하고 있다. 게다가 완벽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예외는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예외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이 오르는 순간, 모든 사람은 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여부나 개인적인 일인 지는 상관이 없다. 그 다음부터는 냉철한 이성을 갖고 있다는 수많은 ‘논객’들의 분석대상이 된다. 요즘들어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미디어의 제목을 차지하는 것이 꼭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몇 가지 의문????’




그리고 그 의문들을 쓴 사람이 심층 깊게 파악했다는 글을 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남을 배려한다는 흔적을 보기도 어렵다. 그저 세련된 신랄함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냉소주의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 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어쩌면 더 못한 사람들이 어차피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새로이 통합된 냉소주의는 자신이 희생자이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이해심을 보인다. 그는 근면하게 동참하는 담담한 겉모습 속에 상처받기 쉬운 불행, 눈물을 쏟고 싶은 욕망을 잔뜩 지니고 다닌다. 그 안에는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슬픔, 즉 자신의 모든 행위와 작업의 궁극적 목표였던 좀더 좋은 지식에 대한 일말의 애도가 들어있다.




페터는 이런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했다.




신문이나 방송기자는 물론이고 네티즌 논객들에게 이러한 ‘계몽된 허위의식’을 경계하자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칼이 아닌 펜에 찔려서 상처받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