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거주할 때 등산을 다녔다. 처음엔 도쿄 인근 산을 갔으나 차츰 반경을 넓혀 중부, 북부 지역까지 찾아가곤 했다. 산을 잘 아는 언론사 동료와 함께 다녀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100개 산을 뽑은 ‘일본 백명산’이 있다. 등산 애호가들 사이에선 죽기 전까지 백명산을 모두 가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경우도 많다. 전부 다니려면 시간과 돈이 꽤 든다. 물론 체력도 버텨줘야 한다.

유명 산악가이며 작가인 후카다 큐야가 전국의 산을 직접 올라본 뒤 최고 산만을 추려 ‘일본 백명산’을 선정했다. 후카다는 ‘산의 품격’ ‘산의 역사’ ‘산의 개성’ 등 3개 기준으로 백명산을 뽑았다. 필자도 이들 백명산 가운데 30여곳에 올라가봤다. 한국인으론 꽤 많이 가본 편이다.

일본의 산을 오를 때마다 한국산과 너무 다르다고 느꼈다. 일본 산은 한국에 비해 매우 높다.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3776m)을 비롯해 3000m를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도 2000m 이하다.

일본 산은 높을 뿐 아니라 매우 험하다. 바위산이 많고 급경사면 산길이어서 자칫 방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등산은 물론 하산 길도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본에서 산행을 하다가 서너 차례는 정말 아찔한 위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너무 무서워 포기한 적도 있다.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좋은 한국 산으로 착각했다간 정말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멀리서 보면 산세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일본산’은 독이 든 맛 있는 과일이다. 멋진 겉 모습만 보고 달려들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산을 다니면서 양국의 산이 국민성을 참 닯았다고 생각하곤했다. 일본의 산은 무섭다. 한국의 산은 따뜻하고 친근하다.

지난달 말 일본에서 한국 등산객 4명이 산행길에서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일본의 ‘중앙 알프스’로 불리는 중부 나가노현 산악 지역인 기소(木曾) 산맥 히노키오다케(檜尾岳·2728m)에서 29일 한국인 등반객 5명이 조난사고를 당해 4명이 숨졌다. 중앙 알프스의 최고봉은 일본 백명산에 포함된 ‘기소고마가타케(2956m)’다.

한국인 단체 등반객 20명은 일본에 함께 입국해 28일 나가노현 고마가네(駒ヶ根)시 이케야마(池山)에서 등반을 시작해 29일 무리를 나눠 호켄다케(寶劍岳·2931m)로 향하던 중 5명이 조난당했다. 이 중 한 사람만 30일 오전 구조됐고 4명이 사망했다. 조난 당시 현장엔 폭우와 강풍이 몰아쳤으며 기온은 10도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사고는 일본 산을 가볍게 보고 무리한 산행을 한 게 원인이다. 한국인 등반객들은 현지 안내인 없이 산행을 했다. 70대 이상이 5명 포함됐으나 안전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조난 당시 호켄다케 정상 부근에선 폭풍우와 함께 시계가 20~30m에 불과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일본의 산들은 워낙 덩치가 커서 산 마니아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실제로 3000m급 산의 정상에 오르면 기분이 너무 좋다. 필자도 후지산을 두 차례 가봤다. 7월 말 한여름 인데도 산 정상엔 만년설이 있고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새로운 별 세상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의 산에 오를 때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일본인들과 협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깊이 사겨보면 일본인들은 참 정이 많고 부드럽다. 하지만 공적 업무가 되면 달라진다. 국가 대 국가, 회사 대 회사 등 공식적인 사안엔 지나칠 정도로 차다.

최근 어려워진 한일 관계도 일본의 국민성과 관련이 있을 듯 싶다. 공인 일본인과 일본은 일본의 산만큼이나 조심해야 한다. 쉽게 보면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한경닷컴 최인한 뉴스국장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