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란 말이 있다.
이 카피라이터는 고구려의 시조가 된 주몽이다.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산에 올라 활 쏘기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부여왕자의 시샘을 받아 궁에서 퇴출되었다.
그 길로 작심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를 세웠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되어 10년 만에 군사들을 이끌고 부여에 들어와
자신이 어릴 적에 활쏘기 하며 뛰어놀던 산자락을 찾았다.

“10년 전엔 나무도 별로 없는 민둥산이었는데 그 사이 숲이 이렇게
무성해져 있다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구나”

주몽은 감회에 젖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주몽이 남긴 이 말도 이제는
세상의 변화속도에 맞춰 ’10년이면 천지가 개벽한다’로 고쳐 써야 할 것 같다.
세상의 변화속도는 따라잡기가 버거울만치 참으로 전광석화와도 같다.

나는 30년 전인 1984년 3월, 잡지 만드는 일에 첫 발을 담갔다.
그후 세월은 유수와 같아 지금에 이르렀다.
주몽의 표현대로라면 강산이 세번은 바뀌었겠으나 돌이켜보니
강산이 세번만 바뀐게 아니다. 상전벽해 수준이다.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 잡지 제작 환경만 되짚어 보더라도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난 30년을 더듬어 보니...세상은
그렇다면 30년 전 잡지 제작 과정은 어떠했을까?
일선 기자들은 매월 잡지 마감이 코 앞에 닥치면
원고지와 사투를 벌이느라 밤을 하얗게 새우기 일쑤였다.

나는 모눈이 그려진 대지(臺紙) 위에 사진식자를 배열하고
트레팔지(얇고 반투명한  종이)를 덧씌워 교정팀에 넘기는 일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현장용어로 ‘대지바리’라 불렀다.
트레팔지 위에 오, 탈자가 체크된 대지를 다시 넘겨받아
교정칼로 오자를 떼어내고 수정자를 풀칠하여 붙였다.
게다가 기자들이 발로 뛰어 현장에서 촬영해온 흑백필름을 건네받아
현상 인화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야근에 철야작업은 다반사였고…
지난 30년을 더듬어 보니...세상은
이렇듯 편집디자인팀 작업은 언제나 부하가 걸려 있었다.
평판인쇄에서 그 판(版)의 설계에 기초가 되는 대지 위에
판면의 마름치수, 제판의 한계치수, 가늠표(돔보)라든지 접히는 구분선도 긋고,
또한 사진을 넣을 자리, 민인쇄로 할 자리, 망점을 씌울 부분 등,
대지 위에 제판 상 필요한 사항을 꼼꼼히 표시해야 한다.
표시가 조금만 틀려도 인쇄 사고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기에 편집부서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끝난 작업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인쇄소 제판실로 달려가
제판 담당자에게 일일이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제판실에서는 건네받은 대지를 일일이 제판 카메라로 촬영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네가티브 필름을 기초로 하여 고바리(소첩)와 하리꼬미(대첩) 작업을 진행한다.
책 크기대로 배열한 포지티브 필름을 최종 확인하는 과정 역시 내 몫이다.
이렇게 제판실에서 필름 교정까지 끝나면 야끼(소부) 공정을 거쳐 인쇄에 들어간다.
인쇄물은 다시 제본소로 이동해 접지와 조아이(장합) 그리고 재단공정을 거쳐
비로소 책이 되어져 나왔다.
당시 제본소의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제본소 작업장은 늘 안개 낀 듯 책먼지로 자욱했고 옆사람과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계 소음도 엄청 심했다.

책이 나오는 날이면 전직원이 제본소로 달려가 발송을 위한 봉투작업을 진행했다.
두어시간 동안 책을 분류해 봉투작업을 하고나면 온 몸은 먼지로 뿌옇게 변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전직원 회식으로 삼겹살을 구워 목구멍에 기름칠을 하곤 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원고지도, 대지작업도 사라졌다.
현상 인화가 필요없는 디지털카메라 등장으로 암실작업도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또한 편집용 소프트웨어 등장으로 잡지 편집디자인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수작업으로 하던 조판을 쿽익스프레스나 포토샵, 일러스트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 작업환경을 컴퓨터로 옮겨왔다. 전자출판 시스템으로 개벽한 것이다.
각종 문자와 그래픽, 사진 등을 편집디자이너가 원하는 대로 배치, 확대, 축소 등이
가능해졌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숨가쁘게 달려 온 30년,
문득 입사 초기, 동료들과 곧잘 어울렸던 명동 입구의
허름한 음악카페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곳을 찾았다.
주렁주렁 내걸린 온갖 귀신스런(?) 물건들, 빛바랜 LP쟈켓도 벽면에 삐뚤빼뚤 그대로다.
돌아갈 것 같지 않은 선풍기는 방향을 잃은 채 천정에 매달려 고개를 꺾고 있다.
몇년째 걸려 있었을지 모를 산타클로스 인형들은 언제나 그 자세로 줄타기 한다.
종이를 오려 장식한 ‘메리크리스마스’는 사계절 변함없이 그대로다.
드럼과 통키타가 있어 이내 포근 모드로 자동변환 되는 곳,
세상은 천지개벽을 했는지 몰라도 추억의 음악실은
용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었다.
지난 30년을 더듬어 보니...세상은
그 곳에서 시시콜콜한 옛 기억을 안주삼아 지난 세월을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