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전국 여러 산을 오르내렸지만 여태 ‘태백산’을 접하지 못했다.
이는 서울 살면서 한강 유람선을 못 타 본 것과 다름없다.

아름다운 설경 명소로 언론에 노출된 건수로만 따진다면 태백산은
우리나라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만큼 지명도가 높다.
그런 태백산을, 이제서야 만나게 되니 숫제 靈山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는 여러번, 그때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불발됐다.

어쩌면 사바세계의 찌든 때가 덕지덕지하여 태백 산신께서
한동안 접근을 허락치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무대뽀로 찾는 걸 삼가하고 때를 기다려 왔다.

그러던 차에 즐겨 이용하는 ‘산방’에 공지가 떳다.

“주목과 상고대의 어울림이 환상적인 태백산으로!”

헤드 카피를 본 순간, 냉큼 꼬리를 달았다. 곧바로 신청했다.
그만큼 내게 있어 태백산은 밀린 숙제와도 같았다.

이번엔 산신께서 입산을 허락하실지, 혹여 길을 내어준다면 겨울 태백산의
진면목인 은빛 설경도 덤으로 펼쳐 주실 건지, 기대하며 길을 나섰다.

그러나 푹한 날씨의 서울을 벗어나 강원 산간에 이르는 동안
창밖 풍경은 설산에 대한 기대를 갖기엔 무리일 듯 싶었다.
응달진 산비탈에만 잔설이 남아 있을 뿐 양지녘은 뽀송뽀송 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버스가 힘겹게 해발 950m의 화방재에 올라서자, 창밖 사정은 달랐다.
산야는 거짓말처럼 하얀 눈으로, 침엽수림은 은빛 상고대로 눈부셨다.
어정쩡하던 기분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버스는 화방재에서 좀 더 진행해 유일사매표소 입구 도로에 멈춰 섰다.
여러대의 버스가 줄지어 정차해 끊임없이 산객들을 쏟아붓고 있다.
북새통을 이룬 도로가에서 설산으로 들기 위한 채비를 갖췄다.
신발끈을 조이고, 스패츠를 차고, 아이젠을 걸고, 썬글라스를 쓰고,
글러브를 끼고, 비니를 눌러썼다.

태백산은 도립공원이라 입장료(개인 2,000원, 단체 1,500원)가 있다.
유일사매표소 담당자가 부스 밖으로 나와 허둥지둥 했다.
단체 산객이 일시에 몰려들어 통제 불능 수준이다.
단체 산객에 대한 정확한 숫자 체크는 어렵고 그저 리딩대장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매표소에서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본격 산길로 접어든다.
은빛세상 속으로 향하는 산객들 모습이 구도자의 행렬처럼 성스럽게 느껴진다.
눈길인데다가 길게 줄지어 걷다보니 걸음은 더딜 수밖에 없다.

먼저 가겠다고 행렬에서 빠져나와 어깨를 툭툭 치며 추월하는
매너 꽝인 인간들이 더러 있긴 하나 대체로 질서정연하다.
이따끔 부는 숲바람에 잎갈나무에 핀 상고대가 눈꽃처럼 흩날린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손끝이 아리다. 손목을 덮은 재킷자락을 걷어 시계를 봤다. 영하 4도다.
강원 산간 치곤 푹한 날씨이나 워낙 걸음이 더뎌 땀이 나질 않아 으스스 한 것이다.
이 보다 추운날도 500m만 걸으면 땀이 나 두툼한 재킷은 벗어
배낭에 넣어야 하지만, 오늘은 그 반대다.
사길령 갈림길에 이르러 하나 둘 행렬에서 비껴나 걸음을 멈춘다.
여벌로 넣어온 다운재킷을 꺼내 입기 위해서다.
화방재를 들머리로 하여 오른 산객들이 이곳에서 합류했다.
은빛 산자락에 형형색색의 산객들이 줄지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걸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유일사 쉼터 안부에 이르자, 산길은 미어터질 듯 극에 달했다.
이번엔 왼편 유일사 방향에서 엄청난 인파가 또다시 합류했다.
출근시간대 전철 환승역 승강장을 방불케 할 정도다.

산객들 배낭엔 제각각 ‘서울, 부산, 대구, 인천…무슨무슨 산악회’가
쓰여진 리본이 매달려 있다. 겨울 태백산은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전국 사투리가 시끌벅적 뒤섞여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병목구간에서 지체시간이 길어지다보니 해프닝도 연속이다.
무리에서 벗어나 산비탈로 앞지르기를 시도하는 몇몇 산객들을 향해
여기저기서 야유 섞인 고함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무튼 겨울 태백산의 주말산행은 인내의 내공이 요구된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 現狀의 모두를 그냥 즐기는 거다.
한적한 산, 홀로 산행을 특히 좋아하지만 가끔은 궤도를 벗어나 오늘처럼
북새통인 산행도 맞닥뜨려 봐야 한다. 편식은 몸에 안좋듯이.
조급함을 내려 놓으니 몸도 마음도 새털처럼 가볍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주목군락지가 막 시작되는 지점, 너른 쉼터에 배낭을 내렸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을 호위무사처럼 사방에 기립시킨 채,
각자 준비해 온 먹을거리를 끄집어 내는데… 참 가지가지다.
밥과 라면은 기본, 과메기에 소고기 육회까지 등장했으니.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뜨끈하게 뱃속을 채우고 나니 사방 풍광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태백산도 식후경이었던 모양이다.
하늘을 떠받친 고봉들의 파노라마에, 가슴은 절로 뻥 뚫리고
예사롭지 않은 자태의 주목에서 종내 눈을 뗄 수가 없다.
꺾이고 휘고 갈라진 고사목에서 무량 세월이 엿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朱木에 注目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몽환적인 주목군락지를 벗어나 태백산의 최고봉인 장군봉(1,567m)에 닿았다.
이곳엔 높이 2.9m, 둘레 20m의 장방형 제단인 장군단(將軍壇)이 있다.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제단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태백산의 기운을 받아 보겠다는 인파들로 북새통인 것이다.
기를 받기는 커녕 있던 기마저 깡그리 소진될 것만 같아
서둘러 지척에 보이는 천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은 한민족 태초의 빛이 쏟아져 내린 곳이라 하여
전국의 무속인들도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태백산은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의 장군봉, 동쪽의 문수봉과
영봉과 문수봉 사이에 부쇠봉, 그리고 동쪽 끝에 두리봉을 품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사람들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힐링을 위해 산을 찾는다.
긴 세월, 산은 아낌없이 지친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보듬어 주었다.
이젠 산이 지쳐가고 있다. 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

태백산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기가 쇠해 더이상 영험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루 입산 인원을 제한한다던가, 구간별 휴식년제를 실시하던가,
어떤 방법이던 간에 반드시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태백산의 백미인 주목과 상고대, 눈꽃의 눈부신 향연 뒤에
치유를 필요로 하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런 아픔이 한으로 맺힌 게 어쩌면 은빛 상고대일지도 모르겠다.

천제단에서 당골 방향으로 한발짝 내려서면 오른편에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원혼을 위로하는 단종비각이다.
변변한 묘 하나 없이 구천을 떠돌던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이르렀고
이를 애달피 여긴 인근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산신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단종비각을 지나 왼편 양지바른 산자락에 망경사가 내려다 보인다.
천제단 바로 아래 8부능선에 자리한 망경사는 조계종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이다.
내려다 보이는 절마당엔 산객들로 빼곡했다.
커피와 컵라면을 파는 간이매점이 있어 그러하다.
이곳엔 또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 ‘용정약수’가 있고,
누구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어 쉼터로도 그만이다.

하산길이 여러갈래인데도 산객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넉넉한 산길이 비좁게 느껴질만큼…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망경사에서 반재 갈림길까지 1.5km 구간은 눈썰매 타기 딱 좋을만큼
설질도 좋고 적설량도 적당하고 내리막도 완만했다.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립공원 관리소 측에서 ‘썰매금지’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반재 갈림길에 이르자 구수한 어묵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한다.
너른 쉼터엔 꼬치어묵에 맥없이 발목 잡힌 산객들로 북적대고…
이곳에서 직진하면 백단사 매표소, 우측으로 내려서면 당골광장 방향이다.
천제단에서 이곳까지 2.2km, 여기서 당골광장까지 2.2km다.
즉, 천제단에서 당골광장까지의 半, 그래서 ‘반재’라나.

반재에서 당골 방향으로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서면 얼음장 밑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당골계곡이다.
계곡 바위들은 하얀 눈을 봉긋이 뒤집어 쓴 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눈꽃축제 준비가 한창인 당골광장을 벗어나 집결지인 제4주차장까지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걸어, 그렇게 태백산 산행을 마감했다.

겨울 태백산 산행을 위한 팁!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새벽산행이나 주중산행을 택하라.
주말산행이라면 아예 인파도 즐기겠다는 각오로 나서라.
영험한 산, 겨울 태백산이 피곤하다.
유일사 매표소→주목군락지→장군봉→천제단→망경사→반재→당골계곡→당골광장→제4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