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로 나오면 5분거리에 사직공원이 있다.
공원을 오른쪽에 끼고 담장을 따라 인왕산길을 오르다 보면
오래된 전각, 황학정 앞뜰에 닿는다.

황학정은 원래 경희궁 내에 있던 여러 전각 중 하나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궁술 연습장이던 등과정(登科亭) 터였으나
일제때 궁의 전각을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활쏘기를 일절 금했던 일제는 이곳에서만 허가했다.
왜일까? 화살촉이 정확히 경복궁을 향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국제사회는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본의 아베를 맹 비난하고 있다.
과거를 망각해버린 천치가 아니라면 뭔가?
선대의 이글거리는 야욕을 곱씹으며 절치부심하는 건가?
하여간 천하의 몹쓸 뇌구조를 지닌 이 인간은
여전히 뻔뻔스런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인왕산(338m)은 나지막하나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鎭山 중 하나다.
특이한 형태의 바위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손끝이 시리고 귓볼이 얼얼했으나 산중턱에 이르니 땀이 흥건하다.
숨을 고르며 양지바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앉는다.

지그시 눈 감으니 인왕산의 거대한 바위벽이 망막 속에 펼쳐진다.
비개인 인왕산의 모습, 바로 ‘인왕제색도’였다.
인왕산에 올라 겸재 정선을 만나다.
홀연히 다가와 동석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겸재 정선이다.
직업병이 발동해 바짝 다가 앉아 인터뷰를 청했다.

– ‘인왕제색도’를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오?

“인왕산 아래 이웃해 살고 있는 투병 중인 친구를 위해 붓을 들었소”

– 그 친구가 부럽소이다. 대체 누구이며 어떤 사이길래?

“내겐 한 동네 한 스승 밑에서 수학한 절친이 있소이다.
그가 바로 ‘사천 이병연’이오. 비록 나이는 나보다 다섯살 위이나 그의 詩와 나의 畵는
‘바늘과 실’ 관계로 세상 사람들은 우릴 보고 ‘詩와 畵라는 표현 매체만 달리 할 뿐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고 격려하는, 조선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하나, 그건 분에 넘치는 과찬이라오.
뭐,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의 만남 정도라고나 할까… ”

–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라 함은?

“그렇소. 우리 사이는 작가와 소장가이기도 하며 솔메이트였소.
실제 내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판매한 사람이 이병연이오.
그는 명망있는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홍보하고 주문도 받아 주었소.
평론가 역할에 큐레이터 역까지 마다하지 않았소이다.
그의 시가 없으면 나의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했고
내 그림이 아니면 그의 시 또한 빛을 잃었지요.
그래서 일찌감치 윈윈 했던 겁니다.”

–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와 그림을 주고 받은 것으로 아는데?

“내가 양천(현, 강서구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해 올때 그가
전별시를 써 주었는데 내용은 이러하오.

자네와 나를 합쳐 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이처럼 인왕산 아래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으로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도
친구는 한쪽 날개가 떨어진 듯 아쉽고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던 것이오. 이에 내가 그림 그려 보내면 그는 시로 화답을 했소.
이렇게 시와 그림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여러날 오고 갔소.
그렇게 그려진 한강 주변의 명승지 서른세폭은 친구의 시와 함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으로 엮어졌고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잘 소장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소이다.

-인왕제색도를 그릴 당시 심정 또한 착잡했을 터인데?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소. 북받쳐 오르는 상실에 대한
슬픔과 쾌유를 비는 마음을 내방식대로 표현해 본 것이라오.”
우정도 세월을 막지 못했다.
조선후기 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은 당대 眞景山水畵의 대가, ‘겸재 정선’의
애틋한 마음을 뒤로 하고 1751년 윤5월 29일 숨을 거뒀다.
친구를 위해 그린 ‘인왕제색도’는 기운차며 장쾌한 붓놀림이 압권이다.
이병연의 죽음을 앞두고 겸재는 그 슬픔을 이 그림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실경산수화로서 가치 또한 대단하다.
인왕산에 올라 겸재 정선을 만나다.
인왕산 정상에서 건너다 본 북악산

으스스 한기가 몰려온다. 자릴 털고 일어났다.
겸재는 이미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 본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이 살았던
지금의 궁정동 쪽을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려는데, 초병이 다가와 제지한다.
청와대 방향은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팻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인왕산에 올라 겸재 정선을 만나다.
인왕산의 등로계단은 흰 페인트로 중앙 점선이 그어져 있다.
경계초소가 곳곳에 있는 걸로 보아 이와 관련있는 듯 싶다.
군사적 이유로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개방된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