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용봉산 찾아 안전산행 기원 '雪祭'를...
“설제 안가실래요?”

야심한 시각(23:07)에 스맛폰 창에 문자가 떠올랐다.
거두절미한 단문이다.
보낸이는 토종 아웃도어브랜드 ‘블랙야크’의 오태균 실장이다.

질세라 단문으로 회신했다.

“언제요?”

“일욜”

어라! 점점 짧아진다.

“어디로?”

“홍성 용봉산”

“갈게요. 어떻게?”

“07시 혜화역 3번 출구, 시커먼소 버스로!”

“감솨함다”

그렇게하여 엉겁결에 ‘설제’에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시산제’는 여러번 경험했으나 ‘설제’는 처음.(실은 그게 그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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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07:00, 전철 4호선 혜화역 지상 도로엔 대형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서울산악연맹의 연례행사인 ‘설제’에 참가하는 가맹단체 회원과
동호인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대기 중인 차량들이다.
1호에서부터 12호까지 12대의 버스가 준비됐다.
내가 편승할 차는 ‘용봉산 3호’라 쓰여진 블랙야크 전용버스다.
조인성 블랙야크 웨핑버스라서 11대의 일반 관광버스들 틈에서 단연 튄다.

산행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기 시작했다.
행사를 돕고 있는 연맹 측 진행요원들 움직임도 덩달아 바빠졌다.
각 차량에 전달할 물품을 나누고, 확인하고, 안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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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 측에서 준비한 선물도 있었다.
초록 색깔의 등산용 컵과 기념 뱃지가 그것이다.
뱃지엔 ‘제42회 설제 홍성 용봉산’ 글씨와 함께 계사년이라
뱀을 형상화한 엠블렘이 양각되어 있다.

08시를 조금 지나 12대의 버스가 행렬을 이루며 출발했다.
동승한 블랙야크 직원들의 복장은 유난히 젊고 밝고 패셔너블했다.
사내 산악회원들이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올 ‘블랙야크’다.

어쨌든 속없이 블랙야크팀에 불청객으로 편승한 모양새다.

내 옆자리엔 오태균 실장, 그리고 앞좌석에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부부가 자리했다.
강태선 회장은 오랜세월 서울산악연맹에 공을 들여왔으며
현재는 동 연맹의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오태균 실장은 아웃도어류 패턴분야 전문가다.
오고가는 내내 의류패턴과 관련된 대화가 이어질 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의욕이 대단했다.

버스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서해대교 행담도휴게소에 잠시 멈춰섰다.
12대의 버스가 줄지어 들어와 산객들을 토해내니
휴게소는 잠깐 사이 형형색색의 산객들로 뒤덮였다.
바깥 날씨가 무척 푹했다. 바닷바람에도 어느새 봄이 실려 있었다.

깜빡 쪽잠을 자고 났더니 오른쪽 창밖으로 우뚝 솟은 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검색했다. 홍성 용봉산이다.
산 들머리로 잡은 용봉초등학교 인근에 차량들이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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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의 진산, 용봉산은 영험한 산으로 입소문 나 있다.
산세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가 얹어진 형상을 닮아
여느 명산 못지않게 산객들로 붐빈다.
산마니아들이 즐겨찾는 100대 인기명산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그래서일까, 많은 산악회가 앞다퉈 시산제 산행지로 이곳을 택한다.

설제나 시산제 장소로 딱인 이유는 몇가지 더 있다.
우선 산 전체가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어 산기운이 영험하다.
산높이는 낮지만(381m) 암릉재미가 쏠쏠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불리어질 만큼 산자수명하다.
또 산행시간이 짧아 산행 후 여유롭게 제를 올릴 수 있다.
더하여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이렇듯 잘 생긴 龍과 鳳은 이래저래 얼굴값 하느라 피곤하다.
현재 산 아래 건설 중인 내포신도시가 완공되면 산객들은 더욱 늘어나
용봉산은 신도시의 배후산으로 사시사철 몸살을 앓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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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안내 팻말이 수신호 하듯 팔 벌려 산 방향을 가리킨다.
좁은 포도를 따라 500m를 걸어가니 넙데데한 미륵불이 반긴다.
턱밑까지 내려온 귀, 가늘고 긴 눈, 넙적하고 낮은 코,
그리고 은은한 미소가 자비로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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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다.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미륵불 앞에서 잠시 합장했다.
작은 가람, 미륵불 용도사에서부터 본격 산길이 시작됐다.
가파른 너덜길이 시작되면서 정체도 시작이다. 땀도 시작이다.

경기 강원 산간지역은 지금도 여전히 설산 모습 그대로인데
이곳 용봉산자락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분명 봄바람이다.
‘雪祭(설제)’ 보다 ‘春祭(춘제)’가 어울릴듯 한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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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석봉에서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오태균 실장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회사 후배들을 보살피며 걷느라 뒤처진 모양이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시선은 투석봉 아래 마을, 소향리와 백월산에 멎는다.

용봉산과 백월산 사이 마을에 ‘소향’이라는 절세미인 처녀가 살았다.
이 ‘소향’을 놓고 용봉산 장수와 백월산 장수가 짝사랑에 빠졌다.
두 장수는 생각했다. 상대만 없으면 소향을 차지할 수 있겠단 생각에
다툼이 시작됐고 결국엔 큰 싸움으로 번졌다.
두 장수는 각각 돌을 집어 상대편 산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세월 쉼없이 돌을 던진 결과 백월산의 돌이 모조리
용봉산으로 날아와 박혔다. 백월산 장수의 힘이 강했던 것이다.
결국 용봉산 장수는 소향을 잃은 대신 수많은 기암괴석을 얻었다.

그렇다면 지금, 기암괴석이 많아 인기명산 반열에 오른 것은,
혹시 먼 훗날을 위한 용봉산 장수의 뛰어난 지략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투석봉에 얽힌 전설을 떠올려 생뚱맞게 재해석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번진다.

한참을 멍 때리는 사이, 오 실장이 지나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둘러 보지만 많은 산객들 틈에 섞여 줄지어 걷다보니 더디다.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나로선 분명 또다른 느낌이다.
1.2km를 걸어 381m 용봉산 정상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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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말에 적힌 봉우리 이름, ‘최고봉’에 여기저기서 빵빵 터진다.
그도 그럴 것이 ‘7대륙 최고봉’이란 말은 익히 들어봤지만
해발 381m 봉우리를 ‘최고봉’이라 이름 붙인 것은 기상천외다.
어쩌면 고정관념의 틀에 쐐기를 박는 발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한번 실소하며 기억하게 되었으니, 어쨌거나 최고 봉우리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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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 정상 표시석에서의 인증샷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연석에 음각된 ‘龍鳳山’ 글씨 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정상석 앞은
보트피플을 연상시킬 만큼 수많은 산객들이 바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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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100m를 더 걸어가면 삼거리 갈림길이다.
팻말은 노적봉 0.3km, 최영장군 활터 0.2km를 가리킨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리 나눠받은 지도를 펼쳐 방향을 확인했다.
최영장군 활터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수가 여기서 노적봉 방향으로
진행해 엉뚱한 곳으로 하산했다며 연맹측의 진행 미숙을 꼬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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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활터에 세워진 팔각정에서 조망되는 산자락은
마치 초콜릿 복근처럼 근육질의 암릉이 펼쳐져 있다.

최영장군은 자신의 날쌘돌이 애마의 능력을 테스트하고 싶어졌다.
자신의 화살이 빠른지, 자신의 애마가 빠른지 내기를 청했다.
지는 쪽은 목을 내놓고 이기면 상을 내리겠다 하였다.
최영은 이곳 활터에서 산아래 은행정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애마도 날쌔게 내달렸다.
은행정에 도착해보니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화살이 지나간 것으로 안 최영장군은 약속대로 애마의 목을 쳤다.
그순간,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최영의 실수였다.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자신의 애마가 죽지 않았을 것을…

이 일로 최영 장군은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지만, 애마는 무슨 죄?
아무튼 전해오는 설은 죄다 ‘침소봉대’ 내지는 ‘과대포장’이다.
그러나 인물전설은 비범하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적 한계를 넘어서기에
민초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전설은 전설일 뿐~, 현실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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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에서 내려서는 길은 까칠한 바위벼랑에 걸려 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취하고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의 질긴
생명력에 놀라고… 그래서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고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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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인 이벤트, ‘설제’ 장소인 청소년수련원 운동장으로 내려섰다.
운동장엔 서울산악연맹 산하 산악회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곧 있을 ‘설제’를 위해 제단을 준비하느라 바쁜 모습들이다.
블랙야크 산악팀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준비해 온 먹을거리를 담아내는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때마침 자리에 함께한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이 반갑게 객을 맞아준다.
염치불구, 빈대? 붙겠다고 하자, 호탕하게 껄껄 웃으신다.
강회장은 오늘 ‘설제’에 제관이기도 하다.

복장을 갖춘 제관들이 제단 앞에 섰다.
‘설제’는 사뭇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날 설제에 올린 축문을 이곳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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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산악연맹회장 조규배는
산악연맹 가맹단체 회원 및 산악동호인들과 함께 산자수려한 이곳,
충남 홍성 용봉산에 제단을 마련하여 진설하고 머리숙여
산신령님께 엎드려 설제(雪祭)를 지내오니 산신령님이시여!
흠향 하시옵시고 저희들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소원을 들어주시옵기를 고하나이다.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우리 강산은 금수강산으로 자랑되어 왔으며
더우기 이 용봉산은 주변 전경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며 충남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명산으로
용의 몸집에 용과 봉황의 머리를 얹은 듯한 형상인데서
유래된 걸로 알려진 산입니다.

우리 산악인 일동은 이러한 대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의 극치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화되며 꾸준한 산행을 통하여
화목과 단결을 배웠으며 한편으로 소박과 준엄한 교훈 속에서
심신을 연마하여 왔습니다.
자연 보호에 정성을 다 받쳐온 우리 산악인 일동은
이 나라 이 겨레의 생성과 발전을 지켜보아 주신 대산영봉들을 바라보며
영험하신 신령님께 비옵나이다.

앞으로도 우리 산악인 일동을 끊임없이 굽어살피시어
무한한 봉록과 행운을 내려주시옵고 전 산악인의 안전과 건전한 동행이
계속되도록 끊임없는 가호가 있으시길 간곡히 기원하오며
엄숙하고도 경건한 마음을 이 잔에 올리오니 산신령이시여!
이 정성을 배례로 받아주시길 기원하나이다.

계사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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