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년 이슬람권을 휩쓸고 있는 재스민혁명은 캐나다와 러시아의 가뭄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세계적 기상이변으로 식료품 값이 오르며 기초생활 여건이 악화되면서 잠재되고 있었던 독재정치에 대한 염증이 표면화되었다는 얘기다. 케인즈(J. M. Keynes)는 기존의 사회기반을 부지불식간에 좀먹으며 확실하게 뒤집는 수단은 화폐가치를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볼셰비키혁명을 주도한 레닌도 자본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역사의 변곡점으로 수차례 작용하였다.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정이 핍박해지자 대원군은 원납전을 강제로 거둬들이고 이것도 턱없이 모자라자 당오전, 당백전을 발행하는 묘수를 썼다. 물물교환을 가까스로 벗어난 상태에서 갑자기 5배, 100배의 유동성이 넘쳐 났으니 소용돌이치는 물가가 문제가 아니라 난파선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언제나 이야기하듯 경제사회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땜질처방을 하게 되면 문제를 잠시 미루고 덮을 뿐이지 시차를 두고 더 불행한 사태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강제로 통용시킨 당오전, 당백전을 관가에서 세금으로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나라님을 믿고 따르겠는가? 기존의 경제 질서는 순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이 그리 추하게 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양반 상민 할것없이 제 핏줄 입에 풀칠시키기도 어려운 판국에서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생각건대,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같은 거인들은 그나마 가세가 괜찮아 적어도 노부모와 처자식 부양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그처럼 크고 먼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4.19혁명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백성들의 삶이 글자 그대로 도탄 지경에 빠져 사람들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촉발되었다. 외세에 힘입어 가까스로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된 나라에서 통치자들은 그저 정권 연장에 혈안이 되어 민생은 뒷전이었다. 일제수탈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부흥시키겠다고 한다는 일이 고작 돈을 찍어 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인이자 기업가인 김광섭은 당시 통화증발로 인한 화폐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보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묘사하였다. 일자리는 없고 물가는 올라 살 수가 없으니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아우성친 것이다.

   10.26 사태도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진행되어 민심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 줄기차게 이어진 경기부양으로 ‘70년대 중반에는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의 2배를 훨씬 넘는 25%까지 치솟았다.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저 박수치며 따라간 “잘 살아 보자”는 구호의 흡인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때처럼 대기업과 실세들만 공짜나 다름없는 초저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 상황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심할수록 손해를 보는 사람들과 반대로 수지맞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화폐가지가 추락할수록 한 푼 두 푼 모아 은행에 저축하면 깨진 독에 물을 붓는 헛수고가 되고, 은행에서 큰돈을 빌려 아무데나 투자하면 앉아서 순식간에 떼돈을 벌 수 있다. 
                 졸고 '인플레이션은 공든 탑을 무너트린다' 참조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치게 하는 인플레이션 독소는 시나브로 스며들다가 어느덧 산지사방으로 번진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 과잉유동성으로 말미암은 인플레이션 악령은 지금 바로 곁에 와있다. 대기성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상황이 전개되고, 기업의 미래가치 전망이 불투명한데도 주식시장 랠리가 일어나는 유동성장세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그러진 상황이 오랫동안 누적되었는데도 이를 단번에 바로 잡겠다고 서둘다가는 아예 초가 삼간 태울 위험이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가계부채 누적과 이에 따른 부동산담보 대출 문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금리를 올리면 화약을 물에 담그는 꼴이 될 것이다. 일단 꼬이기 시작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원상회복이 가능하다는 경제 원리에는 예외가 없다. 주변을 둘러싼 인플레이션 악령을 퇴치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다. 

졸고 '인플레이션인가 거품인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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