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1월, 이남일

1월



이남일



지금은 1월


세상이 멈추어 섰다.


너를 향한 내 발소리도


길 위에 얼어버렸다.



바람이 울지 않아도 날리는


뼛속까지 하얀 눈


겨울을 탓하진 않는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리움이 쌓이는 걸 처음 알았다.



얼음 같은 매화 향기에도


봄기운이 느껴지는 하늘


그대가 보고 싶다.



[태헌의 한역]


一月(일월)



當今卽一月(당금즉일월)


擧世皆息動(거세개식동)


向君吾足聲(향군오족성)


路上已凝凍(노상이응동)


寒風雖不鳴(한풍수불명)


飛雪透骨明(비설투골명)


心益窮(심익궁)


無責冬(무책동)


不愛亦思積(불애역사적)


吾人始得諳(오인시득암)


梅香猶如氷(매향유여빙)


春氣天邊感(춘기천변감)


忽對雲(홀대운)


欲看君(욕간군)



[주석]


* 一月(일월) : 1월.


當今(당금) : 지금, 바로 지금. / 卽(즉) : 곧, 곧 ~이다.


擧世(거세) : 온 세상. / 皆(개) : 모두, 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息動(식동) : 움직임을 멈추다.


向君(향군) : 그대를 향하여, 그대에게. / 吾足聲(오족성) : 내 발소리.


路上(노상) : 길 위, 길 위에서. / 已(이) : 이미.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凝凍(응동) : 얼다, 얼어붙다.


寒風(한풍) : 찬바람, 겨울바람. / 雖(수) : 비록. / 不鳴(불명) : 울지 않다, 소리 내지 않다.


飛雪(비설) : 날리는 눈. / 透骨明(투골명) : 뼛속까지 환하다, 뼛속까지 하얗다. ‘明’에는 희다는 뜻도 있다.


心益窮(심익궁) : 마음이 더욱 궁하다, 마음이 더욱 궁해지다. 이 구절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내용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無(무) : ~이 없다, ~을 하지 않다. / 責(책) : ~을 책망하다, ~을 탓하다. / 冬(동) : 겨울.


不愛(불애) : 사랑하지 않다. / 亦(역) : 또한, 역시. / 思積(사적) : 그리움이 쌓이다. 여기서의 ‘思’는 그리움이라는 뜻이다.


吾人(오인) : 나. / 始(시) : 비로소, 처음으로. / 得諳(득암) : 알다, 알게 되다.


梅香(매향) : 매화 향기. / 猶(유) : 오히려, 아직. / 如氷(여빙) : ~이 얼음과 같다.


春氣(춘기) : 봄기운. / 天邊(천변) : 하늘가, 하늘 끝. / 感(감) : 느끼다, 느껴지다.


忽對雲(홀대운) : 문득 구름을 대하다. 이 구절 역시 ‘心益窮’ 구와 마찬가지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내용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을 하고 싶다. / 看(간) : 보다. / 君(군) : 그대, 당신.



[한역의 직역]


1월



지금은 1월


온 세상이 모두 멈추었다.


그대 향하는 내 발소리도


길 위에서 이미 얼어버렸다.


찬바람 비록 울지 않아도


뼛속까지 하얀, 날리는 눈


마음 더욱 궁해져도


겨울을 탓하진 않는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리움 쌓이는 걸


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매화 향기 아직 얼음 같아도


봄기운이 하늘가에서 느껴진다.


문득 구름 대하니


그대가 보고 싶다.



[한역 노트]


지금은 1월이라도 소한(小寒)·대한(大寒)이 다 지난 막바지 1월이다. 옛 어른들 말씀대로라면 이제 겨울도 다 지나간 이 시점에 역자가 굳이 ‘1월’이라는 제목의 시를 꺼낸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연 때문이었다. 이 시가 눈[雪]을 노래한 시로는 늦었을지 몰라도 매화를 노래한 시로는 이른 편이라 할 수 있다. 남쪽에는 벌써 매화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데, 서울에는 아직 매화의 소식이 감감하기만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서울의 어느 양지바른 모퉁이에서는 지금에도 매화나무가 꽃을 틔우려는 준비로 부산할 것이다. 역자처럼 게으른 자가 이불속에서 몸을 굴리는 시간에도 대자연의 운행은 쉼이 없을 테니깐……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1월은 만상이 멈출 뿐만 아니라 소리조차 얼어버리는 계절이다. 거기에 더해 바람이 없어도 날리는 눈송이가 뼛속까지 하얗게 쌓이는 시련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계절을 탓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본인에게 주어진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복선(伏線)인 것이다. 시인의 시련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떠난 그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게는 그리움이 눈처럼 쌓이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안고 있는 시련의 본질(本質)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단순히 실연의 아픔과 절망을 노래한 작품이 결코 아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언급한, 얼음 같은 매화 향기에도 봄기운이 느껴진다는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대의 말에도 향기가 있어, 기어이 오고야 말 봄의 씨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대가 보고 싶다고 하였을 것이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곳이 그리움조차 절연(絶緣)된 절망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보고 싶음’은 마침내 기다림으로 치환되었을 듯하다.


매화는 그려도 매화가 뿌리는 향기는 그릴 수 없고, 쌓인 눈은 그려도 눈을 밟으며 그리움이 향한 발소리는 그릴 수 없겠지만, 마음의 코로 못 맡을 향기가 무엇일 것이며, 마음의 귀로 못 들을 소리가 또 무엇일까? 마음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이 있을 테니, 역자는 이 시의 숨은 키워드로 ‘마음’을 지목하고자 한다. 지금은, 시인이 실연이라는 시련 속에서 마음의 봄을 기다리듯, 우리는 코로나라는 시련 속에서 마음의 봄을 기다리는 때가 아닌가 싶다. 소한·대한 다 지나도 아직 몸이 움츠려드는 것은, 날이 추워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허허롭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주면 벌써 입춘이 되니 마음 한 자락에 입춘장을 부적처럼 붙여두면, 그리운 봄이 매화 향기처럼 다가와 우리들 품에 안기지 않을까?


역자는 이 시의 한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역자의 부주의까지 겹쳐 이중으로 고생하였다. 애초에 저본으로 삼았던 인터넷 판본이 시의 원본이 아니라 누군가가 임의로 내용을 고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시어를 고치거나 행 나눔을 아무렇게나 해버리고, 심지어 어느 양반의 경우처럼 시행(詩行)의 순서까지 멋대로 바꾸어버리는 것과 같은 나쁜 버릇은 언제쯤에나 사라지게 될까? 시를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을 도대체 언제쯤에나 알게 될까?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자는 4연 12행으로 된 원시를 삼언(三言) 4구와 오언 10구로 이루어진 도합 14구의 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시에 내용이 없는 삼언 2구가 부득이하게 보태지게 되었다. 전체를 오언구로 통일하지 않은 까닭은, 불필요하게 보태지는 글자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한역시는 1구부터 4구까지는 짝수 구에 압운을 하고, 5·6구와 7·8구는 각기 매구에 압운을 하였다. 다시 9구부터 12구까지는 짝수 구에 압운을 하였으며, 13구와 14구는 또 매구에 압운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動(동)’·‘凍(동)’, ‘鳴(명)’·‘明(명)’, ‘窮(궁)’·‘冬(동)’, ‘諳(암)’·‘感(감)’, ‘雲(운)’·‘君(군)’이 된다.


2021. 1. 2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