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특집 : 생활 속의 한시> 安兄白檀杖(안형백단장), 강성위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특집 : 생활 속의 한시> 安兄白檀杖(안형백단장), 강성위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특집 : 생활 속의 한시> 安兄白檀杖(안형백단장), 강성위

[한시]


安兄白檀杖(안형백단장)



姜聲尉(강성위)



未朞安兄有一杖(미기안형유일장)


冠岳白檀剝而成(관악백단박이성)


散步上山恒帶同(산보상산항대동)


親近誠與待媛平(친근성여대원평)


賢閤頻曰縮額事(현합빈왈축액사)


山僧猶亦願見呈(산승유역원견정)


色白形曲似白龍(색백형곡사백룡)


終身恩愛大於鯨(종신은애대어경)



[주석]


* 安兄(안형) : 안형. / 白檀杖(백단장) : 노린재나무로 만든 지팡이. ‘白檀’은 노린재나무를 가리키는 말인데, 나무껍질을 벗긴 색이 희며, 도장을 새기는 데 쓸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未朞(미기) : 아직 돌이 되지 않다. 역자는 이 시에서 ‘朞’를 주갑(周甲), 곧 환갑(還甲)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언제부턴가 60살 언저리의 사람들이 환갑을 ‘돌’로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朞’는 늙거나 장수하는 것을 이르기도 하므로 ‘未朞’는 아직 늙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 有(유) : ~이 있다. / 一杖(일장) : 지팡이 하나.


冠岳(관악) : 관악산(冠岳山). / 剝而成(박이성) : (껍질을) 벗겨 만들다.


散步(산보) : 산보하다. / 上山(상산) : 산에 오르다, 등산하다. / 恒(항) : 항상, 늘. / 帶同(대동) : 대동하다, 데리고 다니다.


親近(친근) : 친근하다. / 誠(성) : 진실로, 정말. / 與待媛平(여대원평) : 미녀를 대하는 것과 같다.


賢閤(현합) : 타인의 아내를 공경(恭敬)하여 일컫는 말. / 頻(빈) : 자주. / 曰(왈) : ~라고 말하다. / 縮額事(축액사) : 이맛살을 찌푸릴 일, 창피한 일.


山僧(산승) : 산승, 산 속의 스님. / 猶亦(유역) : 오히려, 도리어. / 願(원) : ~을 원하다. / 見呈(견정) : ~을 받다. ‘주다’의 피동형이다.


色白(색백) : 색깔이 희다. / 形曲(형곡) : 모양이 굽다. / 似(사) : ~과 같다, ~과 비슷하다. / 白龍(백룡) : 백룡, 흰 용.


終身(종신) : 종신토록, 죽을 때까지. / 恩愛(은애) : 은애, 은혜(恩惠)와 사랑. / 大於鯨(대어경) : 고래보다 크다. ‘於’는 비교를 나타내는 개사(介詞)이다.



[번역]


안형의 노린재나무 지팡이



회갑 안 된 안형에게 지팡이가 있는데


관악산 노린재 껍질 벗겨서 만든 거네


산보나 등산할 때 항상 데리고 다니니


친근함이 정말 미녀 대하는 것과 같네


창피한 일이라고 부인이 자주 말해도


산승들은 되레 지팡이 받길 원한다네


색깔 하얗고 모양 굽어 흰 용과 같은데


종신토록 베풀 은혜 고래보다 크리라



[시작 노트]


멤버가 4명인 단톡방에 어느 날 특별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안형이 북한산 백운대 정상의 바위 위에서 흰 지팡이를 짚고 찍은 사진이었다. 이날 필자의 눈을 놀라게 한 그 지팡이가 자연스레 대화의 소재가 되었는데 스포츠 랠리처럼 톡이 오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이 시가 지어지게 되었다. 시상(詩想)의 샘마저 얼어붙기 십상인 겨울철에 물건 하나가 우연히 시를 짓게도 해주었으니 필자에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형의 지팡이 사연은 이러하다. 10여 년 전 어느 여름날에 안형이 관악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용마골 등산로 인근에서 태풍에 뿌리가 뽑힌 채 누워버린 작은 노린재나무 한 그루를 얼핏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뭔가 이상하게 뒤통수를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되돌아가 그 나무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한 눈에 보아도 지팡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간략히 손을 보아 집으로 가지고 갔다가, 산에 오를 때마다 조금씩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마침내 지금과 같은 지팡이로 태어나게 하였다.


안형은 나이가 아직 50대인데다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잘해왔기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일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등산을 할 때는 물론 산책을 할 때도 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세상에나! 호신용이란다. 안형의 집이 있는 과천처럼 고요하고 호젓한 마을도 흔하지 않으므로, ‘호신용 지팡이’라는 말은 지팡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공연한 너스레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형의 이러한 너스레가 필자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합부인에게는 그렇지 못하여 “창피하니 내다버리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있다고 한다. 하기야 아직 젊고 건강하게만 여겨지는 남편이 노년의 상징인 지팡이를 애인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예쁘게 봐줄 여성분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더군다나 수시로 함께 산행하는 처지이기도 하니 그 ‘이맛살 찌푸림’은 결코 지나친 게 아닐 듯하다. 그러나 산속에 사는 스님들은 입장이 다르다. 그리하여 안형의 지팡이를 볼 때마다 부러워하면서 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안형 지팡이의 색이 하얗고 뱀처럼 굽어 있어 사람들이 ‘백사(白蛇)’로 칭한다고 하여 그렇게 시구를 만들어 보여주었더니, “내가 용띠니까 ‘백사’를 ‘백룡(白龍)’으로 고쳐주시라.”고 하였다. 시어 고치는데 뭐 품이 드는 일도 아니라 필자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백사’가 아무리 귀하대도 그 격이 ‘백룡’을 따를 수는 없을 테니 ‘백사’를 ‘백룡’으로 고친 것이 필자의 마음에도 어지간히 흡족하였다. 필자는 이제 안형이 이 ‘백룡’에 의지해 신선처럼 산을 오르거나 호젓한 길을 노니는 호사를 오래도록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따지고 보면 안형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친해질 친구 하나를 미리 만들어둔 셈이다. 기나긴 인생행로(人生行路)에서 어찌 사람만이 친구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합부인께서도, 부군께서 운명적으로 만난 친구와 절교하라는 잔소리는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으실 걸로 보인다.


이 시는 8구로 구성된 칠언고시로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成(성)’·‘平(평)’·‘呈(정)’·‘鯨(경)’이다. 안형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안형의 성명과 소속 등은 따로 밝히지 않았다. 모두에 있는 사진 두 장은 안형이 제공한 것이고, 글씨는 서예가이기도 한 필자의 동생 심산(心山)이 쓴 것이다.


2021. 1. 19.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