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글”을 쓰는 즐거움

“선생님 칼럼은 아슬아슬해요. 그런데 속이 시원해요. 어떤 사람들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필자가 쓴 칼럼을 읽은 독자의 의견이었다. 공고 공대를 나온 사람이 글을 쓴다는 건 웃기는 일이지만, 어려서부터 글 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대학생일 때 군부 정권에 반항하는 글을 신문에 썼다가 혼이 난 적이 있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사보에 가끔 글을 썼다.

대학과 기업체에 강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15년 동안 5권의 자기계발서를 쓰고, 3권을 번역하고, 신문에 칼럼을 쓴 것은 400여 편이 된다. 주제는 다양하지만 간혹 정부와 정치, 언론에 대한 불평불만도 많이 썼다. 2019년에는 칼럼을 모아 사회비평서를 썼고, 2020년 6월에는 소설, “시간의 복수”를 썼다.

글의 종류, 문학의 유형에는 시(詩)와 소설, 에세이가 있고, 시극이나 시나리오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칼럼은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던지는 글이다. 비평서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 평가를 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자칫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시극이나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괴테는 시극 “파우스트”를 60년 동안 썼고,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년간 썼다. 박경리선생은 소설 “토지”를 25년 넘게 썼으니 가히 좋은 글 한 편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00(BC 790~800)년이 넘었고, 플라톤의 “향연(饗宴, Symposion)”은 기원전 389년이라고 하니 가히 2천 년이 넘도록 전해오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환갑의 나이에 290권의 책을 쓴 작가가 있고, 300만부나 팔린 소설도 있으니 이 글을 쓰는 필자가 감히 “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국 곳곳에서 글을 쓰기 위해 방구석에 처박혀 자판기를 두드리는 작가가 있고, 어느 시골 허름한 초가집에 숨어서 대작(大作)을 쓰고 있는 소설가도 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왜 글을 쓰고 책을 읽는가? 먼 곳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운전을 하는 차를 휴게소에 세워놓고, 줌(ZOOM)으로 독서 모임에 참석해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는 분도 있고, 밥은 굶어도 책을 산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지구촌 전 세계인들이 우울하고 불안해 하며, 경제가 무너진다고 아우성인 바로 이때, 위로가 되는 것이 음악과 책이라면 과언(過言)일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한 문자의 나열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적고, 생각을 표현하면서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글과 문장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기록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위로이기도 하며, 분노를 삭이는 명약이며, 난관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마천은 궁형(宮刑, 성기를 제거함)을 당한 후 “사기(史記)를 썼으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18년 동안 500권을 책을 쓰지 않았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책은 교양 있고 품격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도구일 수도 있는바, 위정자들은 책과 독서를 가장 위험한 “통치의 장애물”로 여겼다. 그래서 히틀러의 대변인 선전장관 괴벨스는 책부터 태웠으며, 이를 기억하기 위해 독일의 베벨광장 지하에는 텅 빈 도서관을 남겨 놓았다.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책을 태웠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서원(書院)부터 태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인들의 독서량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TV 먹방이나 노래방, 연예인들의 개그코너에 빠져 사는 국민들의 의식은 과연 스웨덴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괜찮을지 자못 부끄러울 뿐이다.

이 글 또한 “아슬아슬한 위험”을 무릅쓴 넋두리임을 밝혀 둔다.

※ 필자의 의견은 한경닷컴의 공식적인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홍석기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