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낡은 시설을 보수하느라 부산한 히드로 공항은 옛 영광의 흔적과 세월의 상처를 같이 보는 느낌이었다. 짐을 풀고 뉴스를 들으려 텔레비전을 켜니 낡고 두꺼운 브라운관 화면이 겹쳐지고 우그러져 라디오처럼 소리로만 들어야 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도 설치된 비데가 소위 "디럭스" 호텔에도 없어 영국 경제의 노쇠한 모습을 그대로 보는 느낌이 들었다.

  물에 석회가 섞여 있어 아무 물이나 마시지 못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은 꽤 비싸다. 또 노폐물을 체외로 내 보내는 데도 적지 않은 요금을 내야한다. 목이 말라도 참아야 하고 “자연의 부름”에도 제때 응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를 구가했던 나라였던가? 지구와 똑 같이 우리 인체는 약 70% 정도가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시로 물을 마셔야 하고 소변을 참으면 건강을 해칠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는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공공건물은 화장실을 개방하였고, 어디서든 공공장소에서는 마음껏 아리수를 마실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복지라는 생각이 든다.
 
  버킹검 궁의 근위병은 한 낮의 뜨거운 태양아래 두터운 털모자를 쓰고 열병식을 벌이고 있다. 이를 구경하려고 갖가지 인종의 물결이 발돋움을 하고 있다. 근위병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의전과 멋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관광상품이다.
  ‘85년 플라자협정으로 엔화가 초강세를 보이던 ’80년대 말에는 이곳에 “깃발 부대”가 넘쳐 났었는데 이제는 여기저기서 “쏼라쏼라”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세계경제지도가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굳이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를까? 아마도 일본을 그저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대일본제국이라고 높여 부르던 식민지시대의 남은 찌꺼기가 아닐까? 이곳에 진열된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물을 보면, 극성기에 자국 영토의 무려 110배가 넘는 땅을 식민지로 가진, 영국 땅에는 해가 지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 제국주의 시대 지구촌 곳곳을 침범하며 빼앗거나 헐값에 사들인 남의 나라의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인류의 유산들은 이미 파괴되고 유실되어 지구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들은 약탈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물의 보호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유물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주고 그 복사본들을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 침략과 유린에 대한 반성과 사죄도 할 수 있고 인류 문화유산을 보호했다는 자부심도 동시에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국립미술관의 수 천점의 명화 가운데 루벤스가 그린 저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미술관, 박물관이 그 방대한 규모의 소장품을 무료로 공개하는 것도 복지국가의 모습이라고 했다. 복사된 사진 몇 장 걸어놓고 만원씩 받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목마른 것도 참고, 오줌 마려운 것도 참고 무슨 예술을 감상한다는 말인가?

  이른바 “영국병”은 복지병(welfare disease)의 성격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오랜 번영 끝에 오는 하나의 퇴영현상이 더 큰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 흥망성쇠의 흐름을 누가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5월 IMF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통계상으로 ‘09년 현재 1만 7천 여 달러에 불과하지만, 구매력(ppp) 기준으로 2만 8천 달러를 상회한다고 하였다. 영국의 현실을 보며 이를 실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양국의 소득수준과 소비수준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과도소비 증후군"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하게 된다.

                                                            (“상장회사감사회” 회보에서)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