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유럽행 하늘 길은 황해를 지나 산둥반도, 중국내륙과 우랄산맥을 위를 거쳐 시베리아와 발트 해, 북해로 간다. 아직까지 호기심을 가진 나는 창가 자리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12시간의 비행시간이 그럭저럭 지나갔다.

  중국 대륙은 여름철인데도 녹색보다는 흑갈색을 띈 부분이 많이 보였다. 아마도 땅이 비옥하지 않아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황무지나 고비 사막처럼 버려진 불모지가 많기 때문인가 보다. 이를 보면서 옛날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그 많은 인구를 배부르게 먹이기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이 짙푸른 초원으로 변하고 있다. 얼어붙었던 땅이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녹아가고 있다. 이 동토가 머지않아 세계의 곡창지대로 변모되어 갈 것임을 예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언젠가는 시베리아가 미국 개척기의 캘리포니아처럼 노다지를 캐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릴지도 모르겠다.

  저 아래 멀리 보이는 북 유럽의 농촌은 널찍널찍 잘 정돈되어 있어 수많은 축구장, 럭비구장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 같은 형국을 보이고 있다. 전원교향곡에서 느끼는 서정적 풍경이 눈 아래 펼쳐지고 있다. 이 목가적 모습을 베토벤은 귀로 들을 수 있게 음으로 묘사하고, 앙드레 지드는 눈으로 읽도록 글로 적었다. 또 바르비종 화가들은 “맑은 공기, 맑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살아가는 들판”을 그림으로 그렸다. 
  근세에 유럽이 세계의 경제, 정치, 군사를 주도하게 한 산업혁명은 먼저 농업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얻어진 삶의 여유가 기계혁명, 동력혁명 등을 유발하여 확대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사람은 먹는 일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미래도 그려보고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가지런하게 정돈된 유럽의 전원 위를 날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모처럼 되뇌게 되었다.

  황해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화물선들이 보였는데, 이 곳 북해에는 하얗게 빛나는 요트들이 코발트빛 바다위에 새까맣게 떠있다. 황해에서 북해로 가는 화물선에는 아마도 저 요트에 탄 사람들이 사용할 낚시도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하는 화물선과 휴식을 취하는 요트의 대조되는 모습들이 오늘날 지구촌 불균형(global imbalance)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 중국 등 동아시아 중앙은행들은 물경 5조 달러 이상의 외화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에 유럽 주요국은 경상적자와 재정적자가 이미 한계에 이르러 경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누군가 화물선에서 땀을 흘리는 사이에 중앙은행 금고는 채워지고, 다른 누군가가 요트에서 호사스런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 나라 금고는 비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생산보다 더 큰 소비가 계속되면 개인이든 사회든 빚쟁이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오늘날 아메리카와 유럽의 경상적자와 재정적자 누적은 말할 것도 없이 생산능력보다 더 큰 소비행위가 장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아시아 국가들은 소득격차,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내수기반이 취약해지면서 소비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불황이 예고되고 있다.

  생산을 상징하는 화물선과 소비를 뜻하는 요트를 생각해보자. 생산은 그 자체만으로 하등 의미가 없고 소비자에게 효용을 줄 때에 비로소 가치 있는 경제활동이 된다. 반대로 생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소비자의 선택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효용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산극대화는 경제활동의 중간목표가 되고, 효용극대화는 그 최종목표가 된다. 

  황해 바다의 화물선 기관사는 엊저녁 꿈에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즐기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배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일 자체에 취미보다는 먼저, 먼저 자신과 가정의 안녕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3등 기관사도 꿈꾸고 노력하면 언젠가 저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즐길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바로 "꿈이 있는 사회" 그리고 "위대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상장회사감사회 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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