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300만 년 전쯤 아프리카 남부에 인간과 극히 유사한 원숭이 혹은 원숭이에 유사한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類)가 출현했다. 그리고 런던에 지하철이 생기기 전까지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늘 걸어야 했다. 이후 인류는 먹거리를 구하기 위하여 걷지 않고도 멀리까지 출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걷는다는 것, 걷기를 강요당하는 것은 비천함이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서서히 걷기로부터 멀어졌다. 이제 누구나 차를 타고 다니며 힘들게 두 발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걷기의 종말’이 오는 듯했다.

그런데 걷지 않게 되면서 발은 부실해졌고 온갖 발과 연관된 질병이 새로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걸으면서 사색하던 철학자들은 새로운 철학 사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그저 열심히 걷던 사람들의 생각을 되읊을 뿐이다.

그 혼독 속에 갑자기 모든 사람의 마음의 공허함과 육체의 허약함을 해결해주는 천사가 나타나 ‘걸어라~ 걷고 또 걸어라!’를 속삭이고 다닌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신들린 듯이 ‘그래 걷자~’를 복창하며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천사 덕분에 ‘걷기’는 갑자기 ‘부활의 날개 짓’을 훨훨 폈다. 천사의 이름은 누굴까? 바로 마케터이다.

나 역시 2007년 이래 대략 15년 정도 맨발 신발이라는 시장의 통념을 역행하는 마케팅을 하고 있다. 온갖 재료 역학, 인체 역학, 운동 역학과 스포츠 마케팅이 녹아들어 있는 신발 과학으로 무장한 것이 현대의 신발공학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모든 과학적 기능을 빼고 두께 2-3mm의 부드러운 신발로 마케팅하고 있다. 사실 처음 몇 년 빼고는 공격적 마케팅이라기 보다는 그저 버티는 마케팅을 하면서 소비자에게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차별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모델도 많지 않아 있는 재고에서 골라야 하고, 오프라인 매장도 없어 신어보고 사려면 집으로 와야 한다. 소비자들의 요구는 많지만 맨발같은 느낌이 아니면 안 만들었다.

내 신발의 기본 개념은 몸의 자세가 지구 중력과 수평 수직을 이루면서, 애초에 인간의 발을 진화된 인체 역학을 가급적 되살린다는 것이다. 위 그림을 보면 몽구스가 서있다. 몽구스 몸의 무게 중심선은 지구 중력과 수직을 이룬다. 걷거나 뛸 때도 무게 중심선은 늘 몸 안에 있다. 그리고 몸의 각 관절이 있는 목, 어깨, 허리, 엉덩이, 무릎 그리고 발은 수평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몸이 비틀어지지 않는다. 비틀어진 몸은 뼈가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 그 수평과 수직을 가장 기초는 발이고, 발을 감싸는 신발이 중요하다. 신발이 몸을 수평으로 해주지 않는다면, 몸은 수평과 수직을 이룰 수 없고, 건강은 해치게 된다. 푸트맥스 신발은 그래서 ‘제로드롭’을 강조한다. 발볼, 발가락, 발뒤굼치의 높이가 같다는 의미이다. 키높이 신발, 하이힐, 밑창 딱딱한 플랫 슈즈 등 온갖 기교가 들어있는 현대의 신발과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발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는다. 자기 몸이 자기에게 주는 충격 정도는 스스로 흡수할 수 있고, 그게 오히려 뼈를 강화시킨다고 말해준다.

죽이 되거나 밥이 되거나 저런 신발을 우연찮게 시작해서 그대로 15년이 지났다. 그런데 요즘은 걷기의 부활이 점점 더 활성화되는 듯하다. 거기에는 코로나19의 역할도 상당히 있지 싶다. 사람들은 답답한 실내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더 야외에서 머물고 싶어한다. 그 방법이 바로 등산이고 걷기이다. 바야흐로 인간은 멀리했던 ‘발의 역할’을 다시 불러내기 시작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역설적 선한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

홍재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