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작가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지 않다.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보다는 잘 찍은 아마추어 사진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영원한 아마추어임을 자부(!)까지 하고 있지만, 준거로 삼았고 지금도 존경하는 작가는 있다.
 
사진 초입기 흑백사진에 몰입되었을 즈음, 사진을 통해 전율을 느끼게 했던 두 작가가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최민식씨, 외국에는 프랑스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었다.
두 사람은 캔디드(스냅)와 리얼리즘(비연출) 그리고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발로 찍는’사진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사진을 보면 느낌의 차이가 있다.
아마 두 사람의 공간적, 사회적 차이에 의한 소재나 주제의 선택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최민식씨는 부산에서 오랜 활동을 했는데,
그가 ‘인간(HUMAN)’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시작했을 때는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대여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고된 삶’을 표현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사진엔 따뜻함이 있고, 해학도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메시지가 있다.
 최근에는 국내를 벗어나 힘든 삶을 사는 인도 네팔 등지로 그 표현의 무대를 넓히기도 했다.
이 작가를 통해 나는 사진을 어떤 자세로 임하고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최민식의  부산 1968   
 
 

                서울 용산역 1957 

브레송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찰나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다.
리얼리즘의 다큐멘터리 성격에 예술성을 가미하여 사진을 한 차원 올린 대표적 작가다.
우연성과 사실성,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결정적 순간’이야말로 사진의 절정이다.
프레임 내에 많은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통해 정리해줌으로써 시선의 분산을 막아준다.
특히 망원이나 광각렌즈 사용을 절제하고  찍은 사진을 트리밍 하지 않는 ‘솔직한’사진으로도 유명하다.
나에게 이 작가는 사물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브레송의 라자르역 1932 

그리스 시프노스 1961
 ----한때 트리밍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프레임 주위를 사진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인화시 필름 사이즈보다 약간 넓은 틀의 캐리어를 사용) 

당시 이 두 작가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다른 작가들의 사진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또한 사진의 초현실주의가 특히 일본 사진서적을 통해 엄청나게 유입되고 있었다.
기존 사진의 틀을 깨려는 노력이 지금보다 70~80년대 당시가 오히려 더 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 혼자의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그 때 ‘한국사진이 일본을 따라가려면 30년은 더 걸린다’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야구선수 이치로 같은 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계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사항이다.
서점에 가면 국내 사진 이론책이 총 10권을 넘지 않았었고 내용도 대동소이했는데,
더 실망스러웠던 것은 예로 실렸던 사진들이 일본 책에서 따 붙인 것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청계천 중고책방에서 외국이론서를 뒤지기도 했다.  

이젠 재개발로 인해 서울 시내에 달동네나 판자촌 같은 곳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20~30년 전만 해도 웬만한 비탈이다 싶으면 그런 동네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시내 한 복판에도 건물 뒤 골목골목엔 빈민촌이 엄청 많았다.
88 서울 올림픽 때 외국기자들이 와서 달동네를 찍어 보도했던 기억도 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국민이 많은 나라에서 올림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당시 국내 리얼리즘 사진 애호가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지역을 찾아가 삶의 애환을 표현하려 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여기저기 남아 있는 도시빈민지역을 애써 찾아 다니며 소외층의 삶을 표현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요즘 이런 사진을 보면 ‘삶의 애환’보다는 ‘과거에 대한 추억’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고등학교 때 내가 사진을 한다고 하면, 친구들의 반응은 이런 거였다. “돈 많냐?” 또는 “사진도 예술이냐?”
실제로 사진은 타 예술분야에 비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었다.
장비도 좀 비싼데다가, 소모품 역시 필름과 인화지 현상액을 꾸준히 사대야 했고,
전시회(학교 사진반)라도 할라치면, 카메라가 전당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롤필름 말아서 나눠 쓰고, 모아서 현상하고, 인화의 성공률을 올리면 그리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때까지 좋아했던 플라모델 만들기 취미는 포기해야 했다.

 돈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진이 기술이지, 예술이냐는 비아냥에는 참지 못했다.
나름대로 이론에도 무장됐던 나로서는 무지한 친구들이 인정할 때까지 설명을 했다.
친구들은 내 말을 이해했다기보다 내 열정을 높이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을 한 것이 ‘내가 작품으로 증명하리라’는 것이었다.
도심으로 변두리로, 산으로 들로 마구 돌아다녔다.
다음날이 시험인데도 방과 후에 사진을 찍으러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런 결과는 전시회 때 보람으로 다가왔고,
이후에 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차츰 사진이 예술임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최민식씨나 브레송의 사진을 모방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느낌이 접근한 사진을 만들었을 때 인정해주는 선배들이 있어 더욱 분기탱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준 높은 리얼리즘 사진이 그리 쉽게 모방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사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탓에 잦은 실망감에 빠져 있을 즈음,
국전(현 사진대전)이나, 동아국제살롱에 나오는 다양한 사진들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비사실적인 사진에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필드보다는 암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내 카메라를 사람들 속에서 빼내게 됐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암실에서도 빠져 나왔다.
요즘은 그냥 여행할 일이 있으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 자연을 기웃거리며 찍는 정도다.  
이런 사진은 리얼리즘 대가들의 사진과 비교하면, 장르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깊이도 비교할 수 없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