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저녁 무렵, 서울 외삼촌댁에 다니러 가셨던 엄마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보따리 안에는 내가 입을 사촌언니의 작아진 옷과 병커피, 그리고 길쭉한 과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과일의 이름이 바나나라는 것도, 부드럽고 달콤한 향내 나는 그 맛도 처음 알게 된 날입니다. 그날의 일기 속에서도 바나나가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환상적인 바나나의 맛을 보고 난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바나나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변비와 골다공증, 우울증에도 좋다는 효능 때문에 바나나를 자주 삽니다. 다른 과일보다 가격도 저렴해서 고맙기도 하구요. 어렸을 땐 사과, 배보다도 귀하고 비싼 과일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흔한 과일이 되었습니다. 수만리 배를 타고 온 바나나를 고를 땐 약간 푸르스름한 것을 고릅니다. 요즘 같은 날씨에 하루 이틀 놓아두면 아주 알맞게 익어서 최고의 맛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수확 후에 익어가는 과정을 ‘후숙(後熟)’이라고 합니다. 바나나 말고도 키위, 망고도 ‘후숙’을 거쳐야 더 맛있어 집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어린나이에 가난한 남자와 결혼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혼집을 찾아가보니 그냥 한마디로 소꿉장난이었습니다. 둘이 붙어 누울 수밖에 없는 작은방에 책상으로도 쓰는 밥상과 숟가락, 그릇 몇 개 뿐, 혼수의 필수품인 장롱도 없는 살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끊어온 천으로 손수 커튼을 만들어 달아 놓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는 궁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어찌나 알콩달콩 야무지게 사는지 지금은 근사한 단독주택에 넓은 텃밭까지 가꾸는 알부자가 되어있습니다.



 30대 미혼 남녀가 결혼을 미루는 이유로 남성은 ‘경제적인 기반이 되지 않아서’, 여성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라는 답이 많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여성의 경우도 상대의 경제력을 염두에 둔 답 입니다. 결혼의 걸림돌로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는 얘깁니다. 돈의 위력이 결혼까지도 쥐고 흔드는 것 같아 착잡해 집니다. 시작을 든든한 기반위에서 하려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시작은 작지만 살면서 부풀려 가는 재미와 보람도 나쁘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습니다.



 과일의 단맛을 더해 주듯, 결혼도 ‘후숙’과정을 거쳐 더 단단해 지고 맛이 날 수 있습니다. 조금 작은 집에서 많이 갖추지 못하고 시작하더라도, 두 사람의 땀이 더해지고 마음으로 위해 줄 때 단 맛이 납니다. 혹시 결혼을 미루고 계십니까? 마음 맞는 상대가 있거든 너무 경제적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시작해 보시라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주장합니다.
 
 살아보니, 결혼생활은 근사한 ‘혼수품’보다 ‘성품’이 더 중요하더이다. 혼수품이 주는 행복은 아주 잠깐이더라구요~

김윤숙 <coool6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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