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장막 뒤에서 보이지 않던 폴 볼커(Paul Volcker) 전 FRB 의장이 ‘08 세계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 극성으로 세계경제가 신음하던 '70년대 말 미 연방준비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화폐가치 안정에 온 힘을 쏟았다. 물가안정이 경제사회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라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차단하는데 주력하였다. 실업과 경기침체를 불사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무려 2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통념상 생각하기 어려운 이 "무지막지한 대책"으로 말미암아 의회는 물론 연방정부와의 마찰도 적지 않았고, 농민ㆍ노동계층의 시위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15%에 육박하던 물가상승률을 3% 밑으로 떨어트리며 볼커는 "FRB의 전설"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인플레이션 화이터」(inflation fighter) 볼커의 집요한 물가안정책은 이후 미국경제 호황의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후임자 그린스펀 전의장이나 버냉키 현의장은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좋은 평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볼커는 설사 부작용이 있더라도 한 번 정해진 원칙은 바꾸려들지 않는 뚝심을 가졌다. 문제가 어렵거나 꼬일수록 묘수나 잔재주를 금기로 여겼다. 다시 말해 거시경제 문제는 거시적 차원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물가단속 같은 미시적 미봉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시장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살인적 고물가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80년대 초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게을리 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기까지 하면서 물가안정에 주력하였다.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 유발적 자금조달을 통하여 자본축적을 도모하던 나라에서, 발상의 획기적 전환이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경상수지흑자 기틀을 이룩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고위 정책 관계자가 아마도 "볼커의 고집"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짐작한다면 억측일까?



  볼커는 “금융시장은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과 이기주의가 판치는 곳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금융은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실물부분”을 지원하는데 충실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금융시장 규제를 전폭 완화해야 한다는 레이건 대통령과의 갈등을 계속하다가 1987년 해임 당하고 말았다. 만약 레이건 대통령이 지금 살아있다면 볼커의 해임을 후회할까 모르겠다.
                         졸고 "금융시장 담장은 부활할 것인가?" 참조




  취임 당시 의회의 반대 여론과 취임 이후 FRB 내부의 갈등을 뿌리치고 인플레이션의 싹을 자를 수 있었던 저력의 바탕은 그 스스로  「삶의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융시장에서 특별한 초과이윤을 배척한 것처럼, 그 자신부터 철저하게 공짜점심을 배척하였다. FRB의장에서 물러난 후, 명함만 만들게 해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자리들을 마다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부두노동자들이 피는 싸구려 여송연을 피운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후진사회에서 보면 교황의 사촌 형이라도 된 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봉사하자”던 고위인사 중에는 물러나자 말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서 물러 난지 얼마 안 되는 인사들에게 사실상 공돈을 주어, 그들을 국물재비로 만든 어떤 금융기업 책임자의 이야기가 오래 전에 보도된 일이 있었다. 그 때 안타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뇌리에 떠오른 사람이 바로 폴 볼커였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자본주의 사상 가장 성공한「인플레이션 화이터」의 한사람으로 기록될 볼커의 귀환은 달러범람(dollar glut) 등 혼돈에 빠진 국제금융시은 물론 한국경제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