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는 ‘니체(尼體)’다!

불현듯 서양의 니체와 동양의 공자는 어떤 관계일까라는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왜냐하면 공자의 자(字), 다른 이름은 니체의 ‘니’자를 갖고 있는 ‘중니(仲尼)’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니’와 중니의 ‘니’는 혹시 보이지 않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알아보고 싶었다. 『곡선이 이긴다』 책을 공저한 고두현 시인과 한국 CEO 연구소 강경태 소장과의 주변방담(酒邊放談) 자리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공자가 다시 태어났다는 뜻으로 공자에 버금갈 정도로 현명함을 이르는 중니재생(仲尼再生)이라는 말과 공자의 문인(門人)들, 즉 공자의 학문을 우러러 받드는 사람들을 중니지도(仲尼之徒)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공자는 니라는 말과 특별한 인연이 있든 듯 했다. 그렇다면 왜 공자의 다른 이름을 ‘중니’라고 했을까? 공자의 부모가 니산(尼山)에 가서 기도하며 공자를 낳았으므로 중니라고 했다고 한다. 니산(尼山)의 본래 명칭은 니추산[尼丘山]이다. 공자의 부모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공자를 얻었다고 하여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고, 후손들은 이 산을 '니산[尼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국 산둥성 남부 징후철도 동쪽, 쓰수이강 이남의 구릉지대를 가리킨다(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중니(仲尼)의 ‘니(尼)’는 어떤 의미일까? 첫째, ‘니(尼)’는 ‘가깝다’ 또는 ‘가까이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니(尼)’라는 한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만약 니체를 ‘니체(尼體)’라고 하면니체 철학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니체(尼體)’는 ‘몸에 가깝다’ 또는 ‘몸에 가까이 가다’로 해석된다. 몸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는 몸을 둘러싸고 있는 허례허식이나 가식, 위장이나 포장을 걷어내고 벗은 몸, 알몸이나 나체(裸體)로서의 나를 드러낸다는 의미다. ‘나체’로 나를 드러내야 나의 정체(正體)나 전체(全體)를 알 수 있다. 나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긴 물리적 모습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신념이나 타성에 물든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 심리적 모습이기도 하다. 나를 포장하고 위장하는 모든 관념의 옷을 벗어야 나의 몸, 나의 본질과 정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니체는 그래서 나체다. 나체의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누구인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천개의 얼굴을 가진 다른 니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다. 실제로 니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이고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신체가 갖는 철학적 의미를 포착한 철학자다. 몸에서 분리된 이성, 주객의 분리나 심신 이원론에 반대하고 이성의 시녀로 전락시킨 몸을 전면에 부각시킨 철학자다. 그는 이성(작은 이성)이 몸(커다란 이성)을 지배한다는 말을 뒤집어 오히려 몸이 이성을 움직인다는 했다.



둘째, ‘니(尼)’는 또한 멈춤이나 정지를 의미하므로 니체(尼體)는 몸(體)의 멈춤이나 정지(尼)를 의미하기도 한다. 몸의 멈춤은 변화의 거부나 현실 안주를 의미하지 않고 또 다른 나로 재탄생하거나 변신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서 방향을 점검하고 전략을 탐색하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폭풍전야(暴風前夜)의 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바쁘고 너는 언제나 산만하다. ‘나 바뻐씨’와 ‘너 산만씨’가 만나 오늘도 무슨 일을 왜 하는 지도 모르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잠을 잔다. 허둥지둥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전쟁터로 출근한다. 수많은 사람과 접속하고 다양한 싸이트에 들려 검색을 하지만 정작 사색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우리들. 내가 누구인지보다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 나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하루를 허비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왜 이렇게 항상 바쁘고 힘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기 바빠서 진정 내가 누구인지, 나의 존재에 대해서 한 번도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재촉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의 몸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몸은 말하고 듣고 본다. 멈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몸은 멈추고 쉬어야 한다. 그리고 몸이 가려는 방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셋째, ‘니(尼)’는 ‘비구니(比丘尼)’의 다른 이름을 지칭한다. ‘니(尼)’는 ‘화평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물질적 욕망이 춤을 추는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의 화평을 찾는 비구니에게도 니체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니체는 차라리 고독해지라고 외쳤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라고 외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가장 심각한 정신적 허기를 느끼는 이유는 가난한 고독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고독(孤獨)’한 시간을 가져야 내가 무엇에 ‘중독(中毒)’되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고독’하지 않으면 뭔가에 ‘중독’되어 더 이상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침묵과 함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없다. ‘고독’은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다. 니체는 물질적 욕망을 채우려는 ‘바구니’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밝혀 참나를 만나려는 ‘비구니’다. ‘비구니’는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내 안으로 들어가지만, ‘바구니’는 채울 것을 찾기 위해 밖으로 관심을 돌린다. ‘비구니’는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얻지만 ‘바구니’는 채움으로써 만족을 추구한다. ‘비구니’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지만 ‘바구니’는 욕망하는 물건과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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