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전 일이다. 한국에서 공부하던 말레이시아 학생을 알게 되었다. 배울 기회가 없던 말레이어를 수업료를 내고 배워 보기로 하였다. 표준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어는 뿌리가 같으며 어휘와 표현, 발음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준비된 말레이어 지문을 읽고 문장을 만들어 얘기를 할 때마다 선생님이던 이 말레이 학생이 깔깔대고 웃었다. 내가 하는 말레이어가 너무 인도네시아어 같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형, 우리는 그렇게 말 안해요’ 라고 하며 어휘와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외국인이 북한주민이나 중국동포들이 쓰는 어휘나 억양으로 한국어를 말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의 경험 때문에 나중에 말레이시아에 살 때에도 가급적 인도네시아어는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툴지만 말레이어를 쓰던지 아니면 차라리 영어를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인도네시아 톡톡] 멀고도 가까운 이웃,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관계는 복잡하다. 두 나라는 역사와 문화, 언어에 걸쳐 공유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관계가 미묘하다. 아니 공유하는 것이 많아서 더 미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레이시아에 대해 공부해 보면 말레이시아 역사를 15세기 초 말라카 왕국의 성립으로부터 설명하는 책들이 많다. 여러 설이 있지만 말라카 왕국을 연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는 지금은 인도네시아인 수마트라에서 건너갔거나 아니면 수마트라에서 건너간 세력의 후손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역사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중세의 강력한 동남아 왕조였던 스리위자야 왕국의 통치 영역만 해도 말레이와 수마트라, 자바지역을 모두 아우른다.

역사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말레이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조상 중 상당수는 지금은 인도네시아인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지난 3월 말레이시아 제8대 총리로 취임한 무히딘 야신은 부계쪽으로는 부기스계이고 모계쪽으로는 자바계 혈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기스족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이 터전인 종족인데 내전 등으로 17세기에 대거 말레이 반도로 이주하였다. 자바나 수마트라섬에 있는 종족들의 이주도 몇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이 있는 느그리 슴빌란(Negeri Sembilan) 주에는 수마트라에서 온 미낭까바우 족이 많이 산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도 끝이 뾰족뾰족한 기와모양이 특징인 미낭까바우 양식을 재현해 놓았다. 이 양식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빠당요리 음식점 등에서 볼 수 있다. 같은 미낭까바우 양식이다. 말레이시아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서 느그리 슴빌란주 출신인 말레이 여학생이 자신들이 조상이 몇 세대 전에 말레이시아에 온 미낭까바우 족이라며 빠당에서 온 인도네시아 미낭까바우족 남학생과 조상과 뿌리, 전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도 하였다.

역사도, 조상도, 문화도 공유하고 있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두 나라이지만 껄끄러운 일들도 많았다. 1962년경 말레이반도를 거점으로 한 말라야 연방과 싱가포르, 그리고 보르네오섬 북서쪽의 브루나이, 사라왁, 사바가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새로 출범하려 하자 인도네시아는 역내에서 영향력이 감소할 것을 우려해 이 계획을 반대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지전을 전개하여 1962년부터 4년 동안 두 나라간 충돌(confrontation)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전면전은 아니라고 하지만 인도네시아 군함이 말레이반도에 상륙하기도 하고, 군용기로 공수부대원들을 말레이반도에 떨구어 낙하한 군인들 대부분이 사살되기도 하는 등 살벌한 충돌이 이어졌다. 영토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보르네오섬 동쪽 암발랏 지역을 둘러싼 분쟁에서는 2009년 인도네시아 군함이 말레이시아 군함에 발포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 톡톡] 멀고도 가까운 이웃,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內 인도네시아 근로자 문제도 뜨거웠다. 가사도우미로 와 있는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도 문제가 되었고, 불법체류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에 대한 말레이시아 당국의 처벌도 불씨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불법체류 근로자들을 적발할 경우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는데, 이 처벌이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이라 하여 인도네시아 여론이 들끓었다. 말레이시아는 가사와 육아를 맡아 하는 가사도우미들이나 고된 노동이 필요한 팜농장 일꾼들로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을 필요로 하긴 하였으나 한 때 말레이시아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2백만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들을 은근히 낮게 여기고 무시하거나 이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요즘엔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에서 말레이시아로 날아드는 연무가 문제이다.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산불과 연무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고 여긴다. 연무가 심해지는 때에는 말레이시아 각 도시에서 호흡기 환자가 속출하고 학교도 몇 일씩 휴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런 일이 20년 가까이 해마다 지속되었으니 감정이 좋을 리 없다. 심한 연무 속에 말레이시아에 머물던 어느 날 아침 호텔방 앞에 놓여있던 신문 머릿기사가 생각난다. ‘우리가 이 이웃을 언제까지 참아주어야 하는가?’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이렇게 양국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국민들간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자카르타에 있는 주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지는 광경도 티브이에서 몇 년에 한 번씩은 볼 수 있다. 타이어나 국기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같은 문화유산을 공유하는 두 나라라 때로는 음식이나 전통의상(바띡 등), 문자 같은 것들을 두고 누가 원조이며 그 유산을 계승하는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감정이 상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 함께 공부하던 인도네시아 친구는 말레이시아 사람들과 영어로만 이야기했다. 인도네시아어를 써도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당시 여러 이슈로 두 나라간 갈등이 있어 밖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기가 두렵다는 이유에서였다. 2010년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간 축구대회인 스즈키컵 결승에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격돌한 일이 있었다. 원래 계획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1차전을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함께 관람하며 두 나라를 모두 응원할 생각이었으나 경기 전부터 분위기가 과열되어 자칫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결국 직관을 포기하였다. 큰 충돌은 없었지만 1차전과 2차전이 벌어지는 몇 일간 분위기가 너무 뜨거웠다. 한일전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 톡톡] 멀고도 가까운 이웃,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문화적, 역사적으로도 가까워 600년 전에는 서로 구별도 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웃으로서 껄끄러울 이유도 많지만 가깝게 지내야 할 이유도 많다. 같은 아세안 회원국으로서 역내에는 해결을 위해 공동의 협력이 필요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경제협력을 통한 공동번영 추구같이 거창한 이슈뿐 아니라 수마트라와 칼리만탄 연무문제처럼 역내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들이 있다. 코로나 19처럼 문제해결을 위해선 힘을 반드시 합해야 하는 문제들도 많다. 말레이시아에서 초기 코로나 19 환자 대량발생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열렸던 이슬람 종교행사에 참가했던 집단에서 터졌다. 바이러스는 나라도 민족도 가리지 않는다. 싫으나 좋으나 이웃끼리 방역 협력이 필요하다. 지금 이 바이러스가 지나간 다음에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이 두나라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라들이다. 인도네시아 드라마와 토크쇼, 대중가요는 이미 국경을 넘어 말레이시아 사람들도 함께 즐기고 있다. 말레이시아 만화시리즈인 ‘우핀&이핀’(Upin&Ipin)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인기가 있어 말레이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창(窓)이 되었다. 차이에 집중하면 다른 점이 많지만 밖에서 보면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훨씬 더 눈에 띈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말레이시아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태국과 함께 역내에서 중소득국 지위를 가장 확고히 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멀리 지내면 껄끄러울 일이 없다. 가까운 이웃이니까 껄끄러울 일도 생긴다. 앞으로도 서로 껄끄러울 일은 많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협력하여 시너지를 이뤄갈 수 있을지 주목해 본다.

* 위 내용은 필자 소속기관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양동철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 한국수출입은행(crosus@koreaexi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