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했어도 을(乙)처럼 살자! 

한자의 ‘을(乙)’에 담겨진 삶의 의미를 재해석해보면 삶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은 ‘갑’(甲)과 ‘을’(乙)의 관계로 요약되기도 한다. 흔히 ‘을’은 ‘갑’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갑’에 비해서 을은 둘째라는 뜻이며, 갈지자(乙) 형상을 따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을은 항상 이류, 강자의 ‘갑’에 눌려 살 수 밖에 없는 약자, 양(陽)의 ‘갑’에 순응하는 음(陰)의 위치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음양의 조화가 만들어 가는 상생의 철학이 만들어 간다. 상쟁으로 음이 없는 양의 세계, 양이 없는 음의 세계는 결과적으로 존속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갑과 을은 삶의 빛과 그늘의 관계로도 이해될 수 있다. 햇빛이 있어야 그늘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늘이 있어야 햇빛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늘보다는 햇빛을 추구해왔다. 만약 우리 인생에 햇빛만 있다면 인생이라는 대지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항상 날씨가 좋으면 곧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때로는 고통의 비바람이라 할지라도 불어야 하고 절망의 눈보라라 할지라도 몰아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대지에서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숲의 그늘에 앉아 새들과 함께 내가 쉬었다 갈 수 있다. 계속 햇빛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삶의 그늘을 소멸시켜 버리는 죽음의 햇빛을 원하는 일이다. 정호승 시인의 말이다. 나무 그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 힘들고 피곤해할 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얼마나 행복할까. 빈자인 을을 위해 부자인 갑이 기꺼이 베풀어주는 겸손과 나눔의 그늘은 빈자인 을에게 삶의 활력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갖고 새 출발을 다짐할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乙’은 수직, 직선의 촉급함에 비해 곡선의 여유로움을 함의한다. 서양의 빠름과 효율추구논리와 여기서 싹튼 촉급함의 성미(性味)는 모든 것을 ‘더 많이 더 빠르게’를 지향해오는 질주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제한된 시간에 보다 적은 투입을 해서 보다 많은 산출량을 보다 빠르게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제도와 시스템, 프로세스와 기술을 개발해온 역사가 다름 아닌 산업화의 역사가 아닐까. ‘리얼 라이프’의 저자, 필 맥그로에 따르면 뉴욕에 사는 사람들의 보행 속도는 10년 전보다 10퍼센트 빨라졌고 매일 아침 100만 명의 직장인이 성과 스트레스 때문에 병가를 내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은 한정된 자원과 정해진 시간 안에 이전보다 높은 생산성을 내야하며, 하루 종일 누군가와 접속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다. 인터넷에 자료를 다운 받는 생각보다 느리면 울화통을 터뜨리고, 원하는 것을 몇 초안에 얻지 못하면 기다리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린다. 기다림 속에 싹트는 그리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참고 기다리면서 기대하는 대상과 사람에 대한 설렘의 애틋함이 삶에서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을’은 똑바로 빨리 가는 길보다는 천천히 여유롭게,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기보다는 부드럽게 굽히고 휘어지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바람에 알아서 먼저 눕는 갈대는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뿌리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 갈대가 바람에 맞서 온 몸으로 견디고 버틴다면 가지는 부러지고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두 번째 ‘乙’이 함의하고 있는 삶의 의미는 우회적 삶, 질곡과 변곡점의 삶이 겪어가는 흔적과 궤적의 아름다움을 항변한다. 빨리 자란 나무는 나이테 사이의 간격이 넓고 어렵게 자라는 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촘촘하다. 나이테 간격이 좁다는 것은 자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나이테 간격이 넓다는 것은 어려움 없이 쉽게 자랐다는 것이다. 굽은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라면서 아픔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는 비록 목재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시련과 역경을 견디고 자란 나무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서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솔방울이 여물면 소나무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운 좋은 소나무 씨앗은 비옥한 땅에 떨어져 ‘목재’로서의 가치를 뽐내면서 쑥쑥 자라다가 목수에게 어느 순간 베어지면서 일생을 마감한다. 운이 좋지 못한 소나무 씨앗은 바위틈에 떨어져 씨앗 속에 담고 있는 아주 적은 양의 수분으로 바위에 틈을 마련하고 거기에 빗물을 담아서 치열한 생존투쟁을 시작한다. 자라기 쉬운 터전에 자리 잡은 소나무는 아무런 불편 없이 쑥 쑥 자라서 유명한 건축물의 목재로 쓰이지만 성장과정에 엄청난 장애물인 바윗돌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 씨앗은 몇 십 년을 자라도 땅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성장한 소나무 몇 년 자란 정도도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빠르게 성장한 소나무는 좋은 목재로 쓰여 지기 위해 목수에게 잘려서 한 일생을 마감하지만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극히 작은 키 밖에 안 되는 소나무 분재는 분재 애호가들의 애정 어린 손길로 생명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기반을 우리 인생도 곧게 뻗은 소나무처럼 남의 눈길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자라다가 화려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거목인생이 있는가 하면 악조건 속에서 오랫동안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결정적 기회를 맞이하여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분재 같은 인생이 있다. 고군분투하는 을이여 희망을 가져라. 언젠가는 전화위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그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셋째, 결과적으로 갑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아이디어나 묘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을이라는 점이다. 갑은 돈을 갖고 있고, 을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갑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재정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아이디어는 부족하다. 을은 갑이 갖고 있지 않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갑의 재정적 지원과 을의 아이디어가 만나서 갑의 문제가 해결되고 창조의 꽃이 피는 것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을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시켜줄 많은 갑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오히려 문제를 갖고 있는 갑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을을 찾아 나선다고 할 때 갑과 을의 관계는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갑이 오히려 을에게 잘 해달라고 부탁하고 굽혀야 되지 않을까. 돈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갑이 경제적 측면에서는 약자인 을을 업신여긴다면 바람직한 갑과 을의 인간관계는 형성될 수 없다. 이런 점을 간과하는 갑이 을을 지배와 통제대상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종속적 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갑은 을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인정해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을에 대한 갑의 일방적 지배관계는 거꾸로 을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차용하기 위해 갑이 을에 지배·예속당할 수도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갑이 을이 될 수도 있고, 을은 언젠가 갑이 되는 역전의 관계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비록 지금은 을의 입장에서 갑의 비위를 맞춰야 되는 신세지만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 하나로 얼마든지 인생 역전을 꿈 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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