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흉내 내서 맥가이버가 되어라!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능통한 전문가가 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문제의 복잡성 수준과 난이도 수준이 높아진 시점에서 한 사람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될 능력은 답이 없는 가운데 답을 찾아나서는 다각적인 시도와 도전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형 천재가 되기에는 지식이 너무나 세분화․전문화되었고, 방대해졌다. 레오 나르도 다빈치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삶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관심과 호기심, 지속되는 배움에서의 가차없는 질문, 그리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다양한 분야와 엮어내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Gelb, 1998).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전문가는 많아졌지만 여러 분야에 걸쳐 폭넓은 식견과 안목을 지닌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섭렵해서 능통해지기에는 지식의 깊이와 폭이 너무 심화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변 분야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으며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와 어떤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분야만 깊이 파다가 매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한 우물을 파되 주변을 살펴보면서 파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우물을 파다가 중간에 바위를 만날 수도 있고 더 이상 팔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힐 수도 있다. 더 이상 직선으로 파고들어갈 수 없는 난국에 직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때는 옆으로 팠다가 다시 밑으로 파야 한다. 결론적으로 넓게 파고 들어가야 더 깊이 팔 수 있다는 말이다. 넓게 파기 시작해야 장애물을 비켜 나갈 수도 있고 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거대한 관계망으로 엮여 있다는 깨달음,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무엇보다도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성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물이나 현상도 그것이 존재하게 된 사연과 배경을 파고들면 세상은 모두 관계망으로 엮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브리꼴라쥬도 관계없는 것을 관계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면서 주어진 문제상황 탈출에 기존의 도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닫는 과정이다. 본래 브리꼴라쥬(bricolage)라는 말은 인류학자 Levi-Strauss(1962)가 저술한 ‘야생의 사고’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브리꼴라쥬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 또는 ‘수리’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브리꼴라쥬는 문제상황에 직면하면 현재 가용한 자원을 활용하여 문제상황을 탈출하는 즉흥적 상황판단력이나 임기응변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고장 나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물건, 평소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방치되어 있는 물건, 상식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질적인 물건도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상황을 탈출하는데 신기한 도구로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예술적 창작도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하고 원래 그랬으며 물론 그런 현상을 낯설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지금 상황에서 활용가능한 도구를 갖고 주어진 문제상황을 탈출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브리꼴라쥬다. 브리꼴라쥬는 틀에 박힌 사고, 기존의 지식, 이미 정해진 방법을 거부한다. 언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형화된 매뉴얼이나 지식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브리꼴라쥬는 기존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 안에서 고민하지 않고 길 밖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미 검증된 이론적․실제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를 벗어나는 사유와 실험을 통해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상황을 슬기롭게 탈출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Levi-Strauss가 브리꼴라쥬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 브리꼴라쥬는 비과학적․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브리꼴라쥬에도 나름의 논리와 체계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야생의 사고 또는 야성적 사고다. 서구의 합리적 과학만이 과학이라는 인식의 폭력 앞에 항거하면서 원주민의 미개문명 속에도 나름의 논리적 구성틀과 이해의 관계망이 존재한다는 Levi-Strauss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주장하는 야성적 사고란 원주민들의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사고방식도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관심의 차이에서 서구의 과학과 구분될 뿐 혼돈을 넘어서 나름의 질서를 파악하는 방법이란 점에서는 서구의 과학과 마찬가지의 사고방식이다(이진경, 2005). 따라서 야성적 사고는 원시인이나 미개인들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이다. Levi-Strauss의 야성적 사고는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 중심의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가장 우월하다는 통념에 일격을 가한 일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비서구적인 것은 무조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서구적 사고방식과 태도에도 일침을 가한 사고방식의 전환점이었다. 야성적 사고는 틀림과 다름은 다르다는 깨달음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Levi-Strauss의 야성적 사고는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했던 서구인들의 비서구 사회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도 볼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내가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구적 이성과 합리성으로 사실을 발견하고 법칙을 만드는 과정이 과학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과학적인 것이라는 인식의 기저에는 과학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될 옳은 가치이고 그렇지 못한 비과학적인 것은 폐기해야 될 틀린 것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통념에 통렬한 시비를 건 일대 사건이 바로 야성적 사고의 복권이었다.

야성적 사고를 체득하고 있는 브리꼴뢰르는 브리꼴라쥬를 실제 몸으로 보여주는 손재주꾼이다. 브리꼴뢰르는 일정한 교육을 받았거나 문제해결형 매뉴얼을 따라가는 기존의 기술자나 엔지니어와는 다르게 주어진 상황에서 활용가능한 도구 및 지식과 노하우를 갖고 즉석에서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위기상황을 능수능란하게 탈출하는 사람이다. Levi-Strauss의 설명에 따르면, "손 재주꾼"으로 번역되는 브리꼴뢰르는 보잘 것 없는 판자 조각, 돌멩이나 못쓰게 된 톱이나 망치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집 한 채를 거뜬히 지어내는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목수는 건축에 대한 일반상식은 물론 집 짓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지식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 브리꼴뢰르는 목수처럼 집 짓는데 필요한 상식과 풍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주어진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집을 짓기 위해 지금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몇 가지 도구를 활용해서 목수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기상천외의 아담한 저택을 완성시킬 수 있는 손 재주꾼이다. 즉 목수가 기존의 지식과 건축방법론이라는 틀과 벽에 갖혀서 새로운 방법론을 더 이상 모색하지 않는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은 사람이라면 브리꼴뢰르는 기존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집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브리꼴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과 통념에 대한 남 다른 호기심의 눈초리와 의문의 칼날을 품고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습관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브리꼴뢰르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도구가 별 볼일 없다고 한탄하지 않고 자신이 놓여 있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이 심각한 문제 상황이나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고 갖고 있는 도구가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불평불만을 터뜨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긍정적이면서 침착하게 해석해낸다.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하는 브리꼴뢰르는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천재라고 지칭되는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레고문명을 창조하는 인류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저술한 ‘21세기 사전’(1998, 중앙 M&B 출간)이라는 책에 보면 모든 혼합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용을 갖게 하며 새로운 차이점을 만들도록 독려하는 레고문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에 따르면 앞으로 개인은 다양한 문명철학이나 이데올로기, 문화, 종교, 예술, 과학 같은 요소 중에서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따라 자유롭게 가치체계를 선택할 수 있는 골동상품과 같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미래의 인류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하지 않고 낯선 곳으로 끊임없이 탈주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는 노마디즘을 삶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유목민적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의 인류는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블록을 자유롭게 조립하면서 놀듯이 역사가 만들어 낸 다종다양한 문명을 조립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동일한 레고 블럭이라도 누가 어떤 관심과 목적을 갖고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레고 블럭의 모습이 탄생하듯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문화적 칼라를 어떻게 융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화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자크 아탈리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의 문명과 인류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획일화된 문명으로 녹여내는 용광로형 문명과 인류가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주면서 전체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추구하는 모자이크형 문명과 인류가 21세기를 지배할 것이다. 용광로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모자이크는 다름과 차이를 그대로 존중해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해낸다.

자크 아탈리가 예언했던 레고블럭 문명은 지금 여기서의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을 포용하면서 다양한 세계의 공존을 추구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문명이다. 논어의 자로편에 보면 “子曰 君子和而不同하고 小人同而不和니라”는 말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군자는 화합하되 동(同)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同)하되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한다는 뜻이다. ‘동’(同)은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고, 흡수와 합병의 원리지만 ‘화’(和)의 논리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이고, 조화와 평화의 원리다(신영복, 2004). 화합하되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개성으로 흡수되지 않는 군자의 덕은 다양성을 포용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철학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21세기의 인간은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을 고수하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모습이 아니라, 나와 다른 독특한 상대를 인정하면서 관용의 연대망을 구축하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결국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꼴뢰르형 인간은 기존의 검증된 과학적 이론과 기술적 노하우에 빠져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정주형 인간형에서 낯선 다름의 세계를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출구를 모색하는 유목형 인간형이다. 브리꼴뢰르형 인간은 지역적 경계와 문화적 벽, 영역과 주제의 구분과 분리, 그리고 계층적인 위계와 차별적 선 등 모든 경계와 벽을 무너뜨리고 가로지르며, 레고 놀이와 같은 자유로운 이연연상(二連聯想)을 통한 낯선 조합과 이종결합(異種結合)과 교배를 통한 잡종(雜種)의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다.

브리꼴뢰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천재적인 자질과 역량을 갖고 있지 않지만 맥가이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문제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흥적 판단력과 임기응변력을 지니고 있다. 다 빈치가 평소에 어떤 사고 방식과 노력으로 그렇게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하였는지를 분석해보고 다 빈치와 브리꼴뢰르의 사고방식과 문제해결방식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브리꼴뢰르는 TV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맥가이버와 유사한 점이 많다. 맥가이버는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의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어떤 위기 상황도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도구를 활용하여 능수능란하게 탈출하는 탁월한 문제해결사였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이 배워야 될 점은 다 빈치처럼 될 수는 없지만 다 빈치가 보여준 천재적 기질을 어떤 방식으로 발휘했는지를 분석해본 다음 현대판 브리꼴뢰르라고 볼 수 있는 맥가이버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경주해야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분명한 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의 천재적 기질을 발휘할 수 없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평소에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갖고 노력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될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하기’라는 책을 쓴 Gelb(1998)가 지적한 천재로 다가가는 일곱 가지 원칙 중에서 호기심과 실험정신, 불확실성에 대한 포용력, 예술과 과학의 조화,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포착하는 시스템적 사고를 브리꼴라쥬적 속성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천재적 기질을 발휘한 첫 번째 원동력은 호기심(Curiosita)이다. 꼬치꼬치 캐묻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었던 다 빈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고, 가차 없는 질문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나갔다. 브리꼴뢰르도 역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물과 현상에 의문을 품고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해결대안을 찾아낸다. 이런 과정에서 브뢰꼴뢰르는 일상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본래의 사물과 현상을 다른 용도로 번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끈질기게 캐묻는다.

다 빈치의 두 번째 원칙은 실험 정신(dimostrazione)이다. 실험정신은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실제 생활에 적용해보려는 열의와 고집, 실수에서 배우려는 의지를 지칭한다. 다 빈치는 선입견과 권위를 믿어버리는 고정관념, 책에 나오는 편견에 의문을 던지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리는 습성을 가장 경계하였다. 다 빈치는 특정한 이론을 무조건 믿지 않고 언제나 자신이 실제 경험을 통해 실험한 결과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중시했다. 브리꼴뢰르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검증된 과학적 이론과 기술적 노하우를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주어진 문제 상황에 맞게 번안․가공해서 적용하거나 아예 용도를 바꿔서 적용해봄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부단히 모색한다. 특정 과학적 이론이나 기술적 도구의 용처나 용도를 믿고 따를 경우 그 이론이나 도구의 활용가능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 빈치는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을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방식을 단순히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브리꼴라쥬에 담겨진 기본 철학과 원리도 기존의 이론과 방법을 답습해서는 창의적 대안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정한 목적으로 개발된 이론이나 도구도 얼마든지 다른 목적으로 번안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답이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다 빈치의 천재적 기질을 대변하는 세 번째 원칙인 불확실성에 대한 포용력(sfumato)이다. 독창적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Gelb는 불확실성과 모호함과 패러독스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천재 레오나르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모나리자는 패러독스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대립의 긴장을 감당하는 능력, 애매함과 모호함, 어중간함과 엇비슷함을 보고 끈질기게 그 의미를 탐구하려는 마음가짐과 능력은 다 빈치로 하여금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게 만들었던 결정적 동인이었다. 브뢰꼴뢰르가 직면하는 문제 상황은 기존의 매뉴얼적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브리꼴뢰르가 맞닥드리는 상황은 또한 이미 알려진 해결대안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상황이 대부분이다. 이도저도 되지 않는 진퇴양난의 모순적 상황에서 브리꼴뢰르는 직면한 문제 상황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가용한 자원과 도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시도해본다.

네 번째 원칙은 예술과 과학(arte/scienza), 논리와 상상 사이의 균형 잡힌 조화다. 한 마디로 다 빈치는 뇌 전체를 쓰는 사고방식을 의도적으로 연습했다. 즉 다 빈치는 감성적 사고를 수행하는 우뇌와 논리적 사고를 수행하는 좌뇌를 동시에 썼다.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미술가이자 훌륭한 과학자였다. 토니 부잔(Tony Buzan)이 좌뇌와 우뇌 모두를 균형 있게 쓰도록 하기 위해 고안한 마인드 매핑(mind mapping)도 다 빈치가 메모하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브리꼴뢰르의 즉흥적 상황대처능력이나 임기응변력은 모두 좌뇌 보다는 우뇌에서 발휘된다. 브리꼴뢰르는 문제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를 신속하게 모색하는 순발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는 논리적 사고보다는 직관적 판단련과 상상력이 주로 작용한다. 상황대처 방안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모색한 다음 치밀하게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는 좌뇌가 담당하는 논리적 사고가 관여한다. 결과적으로 브리꼴뢰르도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활용하는 연습을 반복해서 시도한다. 지금까지 학문발전의 역사는 좌뇌적 사고를 강조해왔지만 21세기형 인간에게 더욱 필요한 사고 방식은 우뇌적 사고 방식이다. 생각 너머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논리적 사고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한계와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우뇌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 빈치의 천재적 특성은 연관성(connessione)의 원칙에서 비롯된다. 관계성에 대한 인식과 통찰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존재하는 연결관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적 사고를 지칭한다. Gelb는 다 빈치의 뛰어난 창의성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를 이연연상을 통해 연결하고 결합시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창의성의 핵심은 이연연상을 통한 이종결합이다.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유’와 ‘유’를 엮어서 이루어진다. 다 빈치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창의적 사고의 원동력은 관계없음에서 관계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브리꼴뢰르도 다 빈치처럼 예기치 못한 문제 상황에 직면하면 평소에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낯선 자원과 도구를 조합해서 기존의 틀에 박힌 방식을 탈출하려는 색 다른 시도를 반복한다. 브리꼴뢰르가 보여주는 다 빈치적인 천재성은 ‘쓸모없음’을 ‘쓸모있음’으로 변통시키는 연관성에 대한 혜안과 안목이다. 기존 자원과 도구의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을 결정하는 기준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그 자원과 도구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브리꼴뢰르는 쓸모없다고 버려진 쓰레기 물건이라도 주어진 문제상황에 얼마든지 효용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물건으로 탈바꿈시킨다.

출처: http://blog.naver.com/kecologist/7008044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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