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사무용 볼펜 중에 펜촉이 나오는 부분과 펜촉이 나오도록 누르는 부분의 색깔에 따라 파란 잉크와 빨간 잉크가 써지는 제품이 있습니다.

 

그 부분의 플라스틱이 검은색이면 우리는 당연히 검은색 글씨가 써 질 것을 예상하며 사용하지만 심을 갈아 놓아서 다른 색이 나오는 경우를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제가 일주일에 한번씩 그림을 배우고 있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서 다 쓴 포스터 물감들 중 하나에 다른 색을 담아 놓으셨는데, 저는 알면서도 겉에 붙은 라벨 색을 보고 여러 번 그 물감을 열었다가 닫곤 했습니다.

어려서 친구 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아버님께서 드시려고 물컵 가득 부어놓은 소주를 아무 생각 없이 크게 한 모금 들이켜다 깜짝 놀랬던 기억도 있습니다.

 

사실 파란색 플라스틱 볼펜 안에 파란 심을 넣으라는 법도 없고, 보라색 포스터 물감 케이스 안에 녹색을 담아 놓아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익숙한 우리는 종종 당황하게 됩니다.

 

사람의 경우라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됨됨이와 인격을 짐작하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용하는 물건의 경우라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게 해놓으면 시행착오를 유발하게 됩니다.

 

볼펜 색깔처럼 대부분의 가치는 겉에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속을 채우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됩니다. 겉은 속에 들은 가치를 담을 수 있는 만큼이면 충분합니다. 사람들은 안에 들은 가치를 더 돋보이게 하기위해 겉을 장식하기도 하고, 때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겉만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보석으로 치장한 볼펜이라도 용도에 맞는 색으로 써지지 않으면 사용자에겐 쓸모없는 볼펜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아예 써지지 않는 볼펜도 있습니다. 그래도 볼펜은 심을 바꾸거나 다른 색으로 쓰고자 할 때 사용하기 위해 보관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고 겉을 치장한 사람은 다른 색이 나오는 볼펜보다 더 가치 없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자리일수록 거짓에 대해 더 큰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처음엔 아니었다 해도 자신을 그 일에 합당하도록 발전시키든지, 안 된다면 욕심나는 그 일에서 물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볼펜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그 색을 종이 위에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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