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개월 만에 열린 한일정상회담

민간 외교관
전 한일경제협회 전무이사 허남정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1년 3개월 만에 문 대통령이 아베 일본 총리와 양자회담을 가졌다. 공동합의문의 발표가 없는 것을 보아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50분 가까이 마주앉아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했다는 데에 양 정상은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이 직접 만나 웃으면서 악수하며 대화를 했다는 자체가 이번 한일정상회담의 성과라고 나는 본다. 최악의 한일관계 속에서 많은 국민들은 이 모습에 안도했을 것이다.

정상들은 자주 만나야 한다. 만나지 않으면 서로에 대해 억측과 오해가 쌓인다. 우리의 뿌리 깊은 반일정서 그리고 일본의 혐한의식으로 양국 국민이 듣고 보는 상대에 대한 정보는 구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답은 현장에 있고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당사자와 직접 만나야 한다.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의 모두발언에서 “일한 양국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 역시 귀국하는 기내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가까운 이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도쿄의 친지들과 함께 한 만찬

필자는 11월 하순 발간된 신간을 통해 ‘일본은 원수인가 이웃인가’라는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졌다. 이날 양국 정상으로부터 서로 상대방이 ‘이웃’이라는 공식적인 답변을 들은 셈이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 일컬어졌던 양국 관계에 회복될 단초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자주 만나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신간 출간을 끝내고 며칠 일본에 다녀왔다. 김포공항 체크인 카운터는 예상했던 대로 한산했다. 지난 7월 일본 정부의 대한수출 규제 이후 휘몰아친 국내의 반일 열풍으로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었다. 기내에는 관광을 마치고 귀국하는 일본인 특히 일본 여성들로 만원이었다.

일본의 여성들은 한국이 좋다고 한다. 엔화 강세에다 한일관계의 경색으로 비행기 요금이 공짜나 다름없다. 이들은 지금이 한국을 관광할 찬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방일 관광객이 절반 수준으로 격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은 오히려 늘어났다.

역사적으로 교류를 끊고 무시하고 일본을 제대로 모를 때 우리는 화를 입었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언론이나 SNS을 통해서 듣고 보는 간접 정보는 절반만 진실이다. 지피지기는 백전불태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글이 생각난다.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만주 사람들은 말소리가 개 짖는 것 같고 음식은 역한 냄새 때문에 옆에 갈 수가 없으며 뱀을 시루에 쪄먹고 황제의 누이는 음탕하기 짝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하며 그 말을 전하기에 바빴다”라고 그는 말한다.

명이 멸망한 후 조선은 소중화라는 우월감에 빠져 새로이 등장한 강국 청나라를 깔보았다. 그들에 대한 험담만 찾고 청나라의 발전된 문명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았다. 조선인의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 여진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 찾은 일본의 천년 수도 교토의 단풍은 화려했다. 그런데 관광지를 가득 매운 관광객 속에서 한국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관광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젊은 일본인 커플이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전부 중국인들뿐이잖아!!!”

교토 사찰의 절정을 맞은 단풍

교토에서 탄 택시 안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전 일본 총리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향년 101세였다. 일본에서 이렇게 장수한 정치인은 그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의 부음을 들으며 4년 전 그를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필자의 졸저 < 박태준이 답이다>를 일본에서 번역 출간할 때 그를 찾아 추천사를 부탁했었다. 도쿄 긴자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니 그의 책상 위에는 이미 내 한국어판 저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1982년 12월 총리에 취임하고 최초로 방문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다. 보통 총리 취임 후 처음 가는 외국은 미국이 관례였다. 그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만나 현안이었던 40억불 안보경협 문제를 타결 지었다.

그리고 저녁 청와대에서 있었던 만찬에서는 우리 인기가요 <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한국어로 불렀다고 했다. 그 때를 회상하며 그는 내 앞에서 그 노래를 불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앞두고 그 전날 이 노래를 여러 차례 연습을 했을 것이다.

그가 부른 1절 가사와 멜로디는 정확했다. 97세의 노정치인이 한국의 백면서생을 위해 집에서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대단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극히 작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한 그의 철저한 준비 자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명복을 기원한다.

교토 사찰의 단풍 속에서 휴식을 즐기는 관광객들

이번에 방문한 오사카 교토 도쿄의 길거리나 관광지 그리고 도쿄 근교 산을 오르며 많은 일본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인이 좋다고 하며 하루 속히 지금의 관계가 개선되고 정상화되기를 기대했다.

김형석 교수는 일전에 한림대학에서 있었던 한일평화포럼의 기조연설에서 강조했다. “과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미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의 시민들이 나서야한다”고.

그는 기조연설에서 인적교류 문화교류 그리고 경제협력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치교류는 가장 마지막이다. 시민들의 교류와 협력이 우선되고 정치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나는 100% 동의한다.
(2019. 12. 26)

허남정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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