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는 아프가니스탄 선교단의 피랍사태로 인해 엄청난 파문을 겪었다. 하필이면 유서까지 써놓으면서까지 그 위험한 나라에 선교하러가야했을까? 아마 다른 어떤 기독교국가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 그 죽음의 순간에도 한국인들은 종교적 신념을 끝까지 지켰을 것이다.
이원복교수는 한국인의 심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한국인처럼 대가 센 국민도 아마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를 해도 공산주의를 해도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극단적이고, 무엇을 해도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는 수천 번에 걸친 외세 침략의 역사속에서 지도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생명과 가족, 재산을 지켜야했기에 몸에 밴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지도자와 지배계급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오로지 믿는 것은 자신과 가족 뿐이다. 반면에 한국인만큼 ‘정’에 약하고 감동잘하는 국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에게 신뢰를 주고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이렇게 ‘대가 센’ 국민인 만큼 국가 지도자는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어떠한 정책도 성공하기 어렵다.”(중앙일보, <이원복의 세계사 산책>, 2007.9.3.


원래 우리 한국인은 투명한 것을 좋아한다. 어느 분은 한국인의 심성을 한국인의 산하에 널려있는 화강암에 견주면서 剛勁明淨이란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상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내 마음의 깨끗함을 상대에게 보여주어야 거리낌이 없다.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중국인이나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자신의 속생각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일본인으로서는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桃園結義의 의형제도 한국인 전체에 속속들이 배어있는 이 투명한 심성만큼 결백하고 순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함의 이면에는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끝장을 보아야만 하는 기질도 들어있다. 이 투명한 성정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자칫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서로 마주 달려오는 기관차처럼 끝까지 치달려 충돌을 일으켜야 비로소 속이 후련해진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이 화끈한 기질의 폐단이 보인다.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서로 양 편의 입장이 무엇인지 또 현 사태에 대한 始終을 충분히 고려해서 미리 준비하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러다가 ‘제풀에 지칠 것이라’고 믿고 마음껏 떠들어라 나는 내 갈 길을 가련다는 투로 방치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될 때 전부 아니면 전무의 흑백논리를 서로에게 강요하며 상대가 무조건 항복하기를 요구한다. 결국 몇 명의 사상자까지 나오는 비극적 사태가 발생해야 이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논리만 남아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우리 한국인은 노사간의 갈등이건 지역간의 갈등이건 정치인이건 종교인이건 서로 필사 항전을 외치다 전원 옥쇄의 대파멸을 택하는 방식으로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을 지닌 것 같다. 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라도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막가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면 언론이 주목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언론매체 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그런 사태를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원로회의라도 있어서 중재역할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원로도 없고 원로회의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장(혹은 이익)만 있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거나 자기이외의 권위나 초월적인 공공의 선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막다른 끝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부가 나선다. 아무튼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개입해서 조정이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래보았자 이미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되고,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역사적으로 나쁜 선례를 남기며,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과 긴 파장을 남긴다. 그리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서로 더 극단적인 방식의 투쟁으로 악순환한다. 왜 미리 예상을 하고 준비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이 한국인의 끝장을 보는 화끈한 성질의 한 단면이다. 이렇게 되면 더이상 투명하다느니 강경명정하느니 하는 수사가 어울리지 않는다. 막다른 죽음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미안스런 말이지만 이런 점에 대해서만은 한마디로 어리석음이자 단순 무식이요, 일종의 치기이자 광기에 가깝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주역에서는 일이 드러나기 이전에 그 기미나 조짐을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황소가 된 뒤에 길들이려하지말고 어린 송아지에 뿔빗장을 지르듯이(대축괘 육사효사 童牛之梏 元吉) 어떤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기 이전에 미리 대비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역에서의 “군자는 숨어있는 기미도 알고 드러난 현상도 알며 부드러운 것도 알고 강한 것도 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고 했다.(君子知微知彰 知柔知剛 萬夫之望)” 또 오직 기미를 파악하므로써 천하의 일거리를 이룰 수 있다(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라고 했다. 간단히 바꿔 말하자면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알려지기 이전에 그 일을 맡은 관리나 책임있는 사람들은 먼저 충분하게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음양사상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우리의 모습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풍신수길을 만나고 온 두 사신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를 준다. 결국 두 사신의 간언중에서 채택된 것은 신중하게 미리 대비하자는 신중론이 아니라, 그냥 내 배짱대로 나간다는 막무가내론이었고, 이것이 한국인의 화끈한 성정에 맞는 말이었다. 요즘 텔레비죤의 시사토론회를 보면 점잖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란 사람들조차 음이고 양이고간에 따질 겨를도 없어져버린 것 같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던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본래부터 우리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국주의 침탈과 격동의 근대를 겪으면서 여유가 없어진데에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또 투명한 열정이 나쁜 폐단으로 흐르면 서로 너죽고 나죽자는 파탄으로 치닫기도하지만 좋은 방식으로 표출되면 강한 집중력과 적극적인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 가령 한국인의 화끈한 성격은 ‘한일 월드컵의 신화’같은 꿈을 실현시키기도 한다.  앞으로 혼란스런 이 과도기를 겪고난 뒤에는 이런 단순무식에 가까운 폭력적 논리가 사라지고, 우리에게 먼 앞날을 대비하는 심모원려와 나보다 먼저 상대를 배려해주는 따뜻한 아량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끝장을 보는 기질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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