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임채우


점(占)의 본질은 우연에 있다. 우연의 결과를 가지고 나의 문제를 풀어보는 행위이다. 타고난 생년월일시의 오행(五行) 성분을 분석하고 그 생극(生剋)하는 관계를 따져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지만, 주사위를 던지고 카드를 뽑고 동전을 던져서 치는 점은 순수한 우연의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이런 우연한 그리고 황당한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우연(偶然, contingency)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과관계 없이 일어나는 일. 필연에 반대되는 말. 필연이 ‘반드시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데 대해 ‘예기치 않게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연이 곧 이러한 의미이다. 스토아 학파나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은 우연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우연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인과계열(因果系列) 또는 법칙이 이들 자신에게서 생기지 않은 것을 말한다.”

우연은 온통 혼돈(chaos)속에 있는 듯하지만, 현대과학에서는 숨겨진 질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떤 현상의 원인이나 법칙을 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랴?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연이란 무엇일까? 로또 당첨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의지인가 계시인가?

필자가 경험한 어느 황당한 우연의 경우를 말해보고자 한다.

새차를 사고 난 직후의 일이었으니, 2002년쯤의 일이었던가? 가족들과 함께 전주를 옆으로 지나쳐가게 되었다. 집사람이 비빔밥이 유명하다던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먹으러 가지. 한참 돌아가야 할텐데, 아니 괜찮아. 천천히 가지.

그렇게 지나는 길에 굳이 전주 시내로 들어가 비빔밥을 먹게 되었다. 가려고 하지 않았던 전주를 우연히 들러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전주 비빔밥을 잘하는 집을 물어서 찾아갔다. 식사를 마친 후 내 차에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영 열리지 않았다. 도대체 왜이래? 이거 내차 맞아? 맞는데! 차종도 색깔도 새로 산 깨끗한 차도 유리창문의 선팅도 차번호도 그리고 내가 세워둔 차량의 위치까지도 맞았다. 그런데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열리지를 않으니, 할 수 없이 다시 한번 차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니! 이런! 내 차 뒤에 또 내차가 있었다. 이럴 수가! 번호판의 경기32가 2390번이 전북32가 2390번으로만 바뀌어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같았다. 차종도 색깔도 년식도 선팅도 차번호도 위치도 거기에 하나 더해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자리에! 만일 공장에서 제조할 때 만든 열쇠까지 우연히 같았다고 한다면 나는 어쩌면 그 차를 가지고 서울까지 왔었을 것이다. 아마 며칠은 더 타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일어날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줄여본다고 해도 최소한 벼락맞을 사람이 다시한번 더 벼락을 맞을 확률이라는 로또만큼의 확률은 되지 아닐까? 호주의 한 골퍼는 父子간에 연달아 홀인원을 치고는 그 감격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골프를 그만두었다고 하던데, 수년이 흘렀지만 그 날의 생생한 기억은 잊지 못하고 있다.

혹시 그 차량의 운전자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쓴웃음을 지었을까? 아니면 나만 경험한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래도 그 사건은 우연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쳐야 맞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연이란 무슨 의미인가?

사람들은 모두 우연을 경험한다. 또 그 때 그 일만 우연이었을까? 우리 인생 자체가 우연으로 시작되어서 우연의 연속속에서 살다가 우연의 결과로 죽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연속에서 왔다가 우연속으로 가버리는 것 아닌가? 그렇게 완전한 우연속에 있다면 그것은 필연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은 이 일어나기 어려운 로또만큼은 어렵게 보이는 우연이 남들처럼 로또복권에서 터지지 않고 내게는 겨우 이런 일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웰빙라이프>> 2006년 6월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