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낙엽 한 잎, 홍수희

낙엽 한 잎



홍수희



나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낙엽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여윈 가지 부르르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무수한 것들


비단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아직 내 안에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마음가지 끝 빛 바랜 잎새들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집착과 애증과 연민을 두고


이제는 안녕, 이라고 말해볼까요


물론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태헌의 한역]


落葉一片(낙엽일편)



於樹亦難事(어수역난사)


葉落瘦枝戰(엽락수지전)


及時棄應多(급시기응다)


何獨在樹邊(하독재수변)



吾內飄飄而騷亂(오내표표이소란)


思葉退色懸心枝(사엽퇴색현심지)


執着愛憎及憐憫(집착애증급연민)


與彼告別何容易(여피고별하용이)



[주석]


* 落葉(낙엽) : 낙엽. / 一片(일편) : 한 조각, 한 잎.


於樹(어수) : 나무에게, 나무에게 있어. / 亦(역) : 또, 또한. / 難事(난사) : 어려운 일.


葉落(엽락) : 잎이 떨어지다. / 瘦枝戰(수지전) : 파리한 나뭇가지가 떨다.


及時(급시) : 때가 되다. / 棄應多(기응다) : 버릴 것이 응당 많아지다.


何獨(하독) : 어찌 다만. / 在樹邊(재수변) : 나무 쪽에 있다, 나무 편에 있다.


吾內(오내) : 내 안, 내 안에서. / 飄飄而騷亂(표표이소란) : 나부끼며[팔랑이며] 소란스럽다.


思葉(사엽) : 생각의 잎, 곧 생각. 역자가 원시(原詩)의 뜻을 고려하여 만든 말이다. / 退色(퇴색) : 빛이 바래다. / 懸心枝(현심지) : 마음 가지에 매달리다. ‘心枝’ 역시 역자가 원시의 뜻을 고려하여 만든 말로 마음을 가리킨다.


執着(집착) : 집착. / 愛憎(애증) : 애증. / 及(급) : 그리고. / 憐憫(연민) : 연민.


與彼(여피) : 저들과, 저들과 더불어. 저들은 앞 구절에 나온 집착과 애증, 연민을 받는 말이다. / 告別(고별) : 작별(作別)을 고하다. / 何容易(하용이) : 어찌 쉽겠는가?



[직역]


낙엽 한 잎



나무에게도 어려운 일이어서


잎 떨어지자 여윈 가지가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릴 게 응당 많아지는 것이


어찌 나무에게만 있을까요?



내 안에서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생각의 잎들이 빛바랜 채 마음 가지에 달렸습니다.


집착과 애증 그리고 연민,


저들과 작별 고하기가 어찌 쉬울까요?



[한역 노트]


때가 되면 당연히 버릴 것이 많아지지만, 정작 버려야 할 것을 제 때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네 인생은 괴롭다. 나무는 여윈 가지를 떨면서도 버릴 줄을 알아, 가벼워진 몸으로 혹한을 견뎌내고 새 봄을 맞는데도 말이다. 기껏 100년도 못 채우는 인생이 늘 천년의 근심을 품고 산다는 옛 시구[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새로 무슨 일을 시작하기보다 더 어려운 이 ‘결별할 수 없음’ 때문에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나날을 더 괴로워해야 하는 것일까? 나무가 가지에 달린 나뭇잎을 떨구듯이 마음 가지에 달려있는 저 빛바랜 생각의 잎들을 떨구는 일이 시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탓에, 이 시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말이 절로 가슴에 와 닿게 될 것이다.


연 구분 없이 10행으로 된 원시를 역자는 오언 4구와 칠언 4구로 구성된 고시로 한역(漢譯)하였다. 첫머리 3행과 마지막 3행을 각각 2구의 한시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시어 일부를 시화(詩化)시키지 못하였지만, 시의 대체(大體)를 이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한역시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戰(전)’과 ‘邊(변)’, ‘枝(지)’와 ‘易(이)’이다.


만추(晩秋)는 낙엽의 계절이다. 어느 시인은 낙엽을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유하였고, 또 어느 시인은 번져가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어쨌거나 만추에 낙엽이 휘날릴 때면 낙엽만큼이나 많은 상념이 마음의 나루로 들어오는 까닭에 역자는, 낙엽은 어쩌면 상념을 낚아 오는 배가 아닐까 여겨보며 작년 이맘 때 쯤에 짧은 시 하나를 지어보게 되었다.



晩秋對落葉(만추대낙엽)


染葉蕭蕭飛落際(염엽소소비락제)


許多思念入心津(허다사념입심진)


能云落葉爲搖艇(능운낙엽위요정)


忽釣身邊思念臻(홀조신변사념진)



만추에 낙엽을 대하고서


물든 잎새 쓸쓸히 날아 떨어질 때면


많고 많은 사념이 마음 나루에 드네.


말할 수 있으리라, 낙엽이 배가 되어


문득 신변의 사념 낚아 오는 거라고…



그러나 기실 이 시는, 역자가 젊은 시절에 누군가를 짝사랑하면서 지었던 아래의 한글시를 약간 변형시켜 한시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시절 만추가 불현듯 그리워진다. 아픔도 세월이 가면 아름다움이 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지금 낙엽이 쌓인 길을 걷고 있다.


낙엽이 지면


낙엽만큼이나 많은 상념이


마음의 항구로 들어오기에


낙엽은 상념을 낚아오는 배가 된다.


그리움을 실은 배 갑판에 선 나는


그대에게로 항해하는 마도로스다.



2019. 11. 12.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