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엔 술자리가 많다. 그런 자리에 끼지 못하면 소외 당한 느낌도 들고 어딘가 허전하기도 하다. 강의도 별로 없을 때다. 그래서 연말연시에는 쌓아 놓은 서류도 정리하고, 사다 놓고 읽지 못한 책도 읽고, 평소에 생각을 정리하면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래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데 마침, 어느 날 진주에서 강의 의뢰가 왔다. 저녁에 로타리클럽에서 송년모임을 하는데 공식행사 끝나고 만찬을 한 후에 90분간 강의를 해 달라는 거였다.

“아니? 공식행사를 하고 나면 지루해지고,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술도 마시고 나면 어수선할 텐데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강의를…?”

강사료는 서운치 않게 준다고 하니까 가지 않을 필요는 없겠지만, 벌써 몇 번 가보았던 로타리클럽이고 하니 단단히 마음 먹고, 아침에 오산에서 강의를 마치고 김포로 가 비행기를 타고 사천비행장에 내렸다. 두 분이 승용차를 갖고 마중을 나왔다. 인사를 나누고 분위기를 묻고, 예식장에 들어 서니 아니나 다를까?

6층 로비에는 음식이 가득하고, 식장 내에는 둥그렇게 둘러 않아 어수선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귀빈 인사, 표창장 수여, 감사패 수여, 축사, 사업 보고 및 사업계획 보고, 행운권 추첨…. 끝없이 이어지는 사전행사는 7시 반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제 식사를 시작하면 또 한 시간 가겠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막걸리와 소주, 맥주 병들을 보니 강의는 무슨 강의, 한 이삼십 분만 하고 끝내달라고 하겠지.”

8시가 넘어 식사를 마무리하자는 사회자의 진행발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은 돌아가고 있었다. 간단한 로타리클럽 회장의 강사소개에 이어 강단에 선 나는 단단히 마음 먹고 지금의 심정을 전달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9시 반이 될 때까지 80분 동안 모두는 진지했다.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노트 필기를 하며, 조는 사람은 서너 명밖에 없었다. 그날의 특강은 평소 다른 교육과정의 강의와 다름이 없었다. 정말 대단한 집단이었다.


심야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마음은 한결 개운했다. 괜스레 걱정에 가득차서 내려간 비행기보다 빠른 것 같았다. 한 숨 자고 나니 고속터미널이었다. 근처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 아들에게 대리운전비 2만원을 주었다.


두어시간 눈을 부치고,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인 이노비즈에 조찬 특강을 갔다. 거기엔 중소기업 CEO들이 아침 6시 반부터 몰려 들고 있었다. 매출 200억을 달성하고 경상이익이 30억이 넘었다는 어느 사장님은 겸손한 자세로 명함을 건네 주었다.


송년회가 달라지고 있다. 문화 예술 행사를 곁들이고, 재미있는 잔치 프로그램에 엄격한 교육과 특강을 끼워 넣고, 불우이웃 돕기를 추진하고 있다. 소득이 높아지고, 문화 수준이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회식 때만 먹을 수 있는 고기와 술의 풍성한 맛을 느끼기 위해 기다리던 연말연시를 이제는 평소에 즐길 수 있으니 이젠, 송년회라고 하여 술과 노래에 취할 게 아니라, 배움과 깨달음과 느낌의 시간을 마련하여, 영혼과 정신의 갈증을 채우자고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겠지.

사회적 동물로써의 인간은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인류의 진화를 위해서, 생리적인 욕구를 채우고 나면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채우고 싶은 거니까.


이렇게 사회가 변하고 국민들이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민생의 하루하루가 달려 있는 정부 예산안도 결의하지 못하는 국회는 아직도 변화의 물결을 읽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은 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