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바쁜 일정으로 정신 없이 살고 있는 가운데 어느 기업체에서 사보(社報)에 실을 원고 한 편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잠시 망설이다가 마감기한을 묻는 과정에서 마음이 약해져 할 수 없이 원고를 써 드리겠다고 약속을 한다. 전화를 끊자 마자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

마감 기일이 되었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한 글을 살펴 보며 끙끙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온다.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며 사정을 한다. 누가 누구에게 사정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게 있다. 또 후회를 한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원고가 실린 책이나 잡지가 배달되어 온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열어 내가 쓴 글을 읽어 본다. 즐거운 마음은 잠시, 곧바로 또 후회를 한다.

“아니 여기는 왜 이렇게 썼지?”
“이 부분은 빼 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왜 그냥 두었지? 약력은 또 이게 뭐야?”

마음과 기대에 차지 않아 던져 버리고 싶지만 어딘가 깊숙한 곳에 꽂아 둔다.


회사에서 명예로운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여러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직장 동료들과 진지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며 입장을 묻고 생각을 한다. 정말 명예롭게 나가고 싶지만 훗날을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모를 결정을 한다.

“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동시에 대학에 보내야 하고, 중간에 빌려 쓰고 일부 받은 게 있는 퇴직금은 기대할 수 없고, 늘어 난 살림살이 수준도 만만치 않을 테고, 그렇다고 금방 어디서 오라는 곳도 없고 나이는 먹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살려야 하고,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야 하고, 언젠가는 직장인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면,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입장에 있는 내가 나가야 하지 않을까?”

또 용기를 내어 선택을 한다.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다.

인생의 기로(岐路)가 될 수 있고, 최고의 전환점(Turning Point)가 될 수 있으며, 어쩌면 가장 불행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를 순간의 선택이 된다.

사직서를 쓰면서 몇 번씩 망설인다. 글씨가 제대로 써질 리가 없다. 그냥 인쇄해서 도장만 찍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자필(自筆)로, 잘 쓰고 싶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쓰레기를 치우고, 서류를 분류해 가며 다른 직원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몇 개의 작은 상자를 노끈으로 묶어 트렁크에 싣는다. 누군가 도와 주려고 하지만 침침해지는 눈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날 저녁은 밤새도록 후회한다. 며칠 동안 아니, 몇 년 동안 후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선택은 끝났다. 이젠 책임질 일만 남았다. 나 자신의 미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고,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잘 사는 척 해야 하는 책임이 놓여 있다. 그래서 더욱 잘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 감추어진 용기를 내고,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을 내비치며,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을 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느끼는 감정들이 다양해지고, 사서 읽는 책이나 신문들의 종류가 달라진다. 어색한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나약한 마음이 강해지면서 배짱이 생기고, 흐리멍덩했던 느낌의 기준이 명백한 사실의 판단으로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온실에서 따뜻하게 자라던 나무가 갑자기 들판에 내버려진 느낌이다. 후회와 반성의 반복, 선택 기준의 변화, 판단과 의사결정의 갈등, 경제력과 개인 역량의 관계에 대한 착각과 오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선택적 결과, 예측과 판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각, 잘못된 만남의 치명적인 손해 등을 경험하고 학습하게 된다.

부산을 가는데 비행기를 탈까 KTX를 탈까? 목요일에 만날까 금요일에 만날까? 회사를 옮길까 말까? 이 책을 살까 저 책을 살까? 공을 치러 갈까 등산을 할까? 시골집에 가야하나 처가집에 가야 하나?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한다. 거기엔 책임도 따르고 의무도 따르지만, 새로운 경험도 하고 느낌도 다르다. 의미 있는 기회도 되고 가치 있는 도전도 된다.

며칠 전 어느 출판사를 만나 또 다시 후회할지도 모를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런 후회와 반성은 아직도 여러 번 필요할 것 같다.

무덤에 들어 갈 때까지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책임과 의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게 인생이니까. 선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망설이지 않는 것도 습관이다.


다만, 탁월한 선택과 최고의 결정에는 그만한 시간의 경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