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웃에 사는 박 사장님을 불러 냈다.



이어지는 연휴에 별 부담 없이 취해도 좋을 것 같아 그 분과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20 여명의 직원을 데리고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50대 후반의 박 사장님은 요즘 속상한 일이 한가지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괜찮은 대학 괜찮은 학과를 졸업한 딸내미가 1년째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은 40여년 전, 아주 깊은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 서너살 때 읍내 중학교를 다녔다.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폐허가 된 50년대 말,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도 되지 않던 당시, 그 분은 가난한 시골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항아리째 싸 주시는 걸 어깨에 메고, 보리쌀과 옥수수 가루를 양손에 들고 20리를 걸어 읍내로 나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면 서기(面 書記)가 되라는 부모님의 권고를 뿌리치고 서울로 올라와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며 신문을 돌리고 우유를 배달했다.



어머님이 담가 주신 김치통을 보자기에 싸 들고, 버스를 타고 야간열차를 갈아 타고, 차내에 온통 김치냄새를 풍기며 차장(안내양)의 눈치를 피해가며 천리길을 오고 갔다. 예닐곱살의 나이에 건물 경비를 서고 구두를 닦은 돈으로 한 달치 보리쌀을 사 놓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보리쌀을 팔아 책을 빌려 읽었다. 5원으로 3권의 책을 빌려 3일 안에 다 읽어야 했다.



눈물 젖은 보리개떡을 먹으며 밤새워 읽은 책은 스탕달의 적과 흑,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 톨스토이의 인생론 등이었다. 청계천 시장에서 주워 온 천자문을 외우며 붓글씨를 배우고 너덜너덜한 영어사전을 찾으며 ABC를 배웠다.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하며 중고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당시 상고 졸업생들이 선호하던 은행을 마다하고 중소기업에서 5~6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다가 욕심에 차지 않아 사업을 시작한 그는 40년 가까이 사업을 하고 있지만, 망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50명도 되지 않는 작은 회사에서 경리 업무뿐만 아니라 차표 예매와 우체국 심부름, 고객 접대와 생산관리, 영업과 품질관리, 기술개발과 공장 청소 등 잡일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일을 배운 덕택이었다. 그때 익힌 현장 경험과 수치적인 감각, 감성적인 언어의 마술이 종합예술로 승화되어, 대학을 다녀 본 적이 없는 그가 지금은 대졸 사원을 뽑고 관리하고 경영하고 리드하고 있다.



최근의 국가적 사회적 어려움을 한탄하시며, 취직을 하지 못해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용돈만 타서 쓰는 딸내미의 나약함이 결코 한 가정의 애환만이 아님을 토로하셨다. 밤이 깊은 줄 모르며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면서 콧등위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계셨다. 필자 역시 쉽지 않게 살아 온 과거를 생각하며 공감을 했으나 별 도움을 줄 게 없었다.



정보화 시대의 오류니 인문학의 위기니 하면서 말장난만 하는 게으름으로 일자리 하나 만들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국가 경영능력에 박 사장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부딪힌 술잔에서 오랜만에 인간적인 냄새가 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