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영농 후계자들에게 변화관리에 관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거나 망해가는 기업의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미래전략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망설여진다. 그 쪽 분야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특별히 전해 줄 경험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소득과 거절하지 못하는 나약함이 어우러져 적절히 협의한 후 강의를 수락한다. 그리고 곧바로 고민에 빠진다. 무슨 말씀을 해 드릴까? 정말 내 강의가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필자가 성장하는 동안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생님이 계셨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고민과 갈등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심어 준 은사님과 훌륭한 교수님이 계셨다. 별 거 아닐 것 같은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 준 말과 글이 있었고, 좋은 책이 있었다.



그런 분들과 책들을 통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연한 현실에 안주했던 촌뜨기는 그나마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만일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값진 책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면 현재보다 못한 상황에서 더 깊은 쇠락의 골짜기에서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바꿔 본다.



우리의 현재가 있기까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문명과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기까지 너무 많은 역사와 진화가 이어져 왔다. 에디슨과 모짜르트, 마틴 루터와 김구 선생이 있었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아인쉬타인과 르느와르도 있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생각하며, 그들을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키우고 영향을 미친 그들의 스승과 은사를 생각해 본다. 가르침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인가?



이제 나 자신이 늙어 가고 있다. 짧은 경험과 얕은 지식이나마 전달해 줄 위치가 되었고, 그럴 시간이 되었다. 좋은 스승이 되어 줄 입장이 되었다. 후배들에게 훌륭한 인물로 기억되진 못해도,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전해 주고 싶다. 그런 입장이 되었는데 두렵고 아쉬울 때가 있다. 기업체에서나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 나올 때마다 아쉬운 점이 많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더 많이 준비했어야 했는데…”

“다음엔 더 잘 해야지, 어떻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누굴 위해서?”

“누굴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고, 갈등을 느끼는 걸까?”

“왜 강사와 교수들은 강의를 잘하고 싶어 할까?”





파커 J. 파머가 말한 것처럼 “무대 뒤의 내 무능력이 폭로될까봐, 무대 앞의 연기를 더욱 매끄럽고 부드럽게 꾸미려고 애쓰는 건” 아닐까? 자신의 본질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 하여 이와 같은 고민을 하고 갈등에 빠지는 건 아닐까? 자문해 본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고, 어학 공부도 하고, 다양한 분들과의 인적 교류도 더 넓히고, 강의 기법이나 강의 기술도 더 연마해야겠다. 시간과의 싸움이며, 책과의 결투이며, 처절한 삶의 투쟁을 벌여야겠다. 이는 현실이며 현장이다.



존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더욱 위대한 스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용기를 내어 강단에 서기 위해 게으를 자유가 없다. 배우지 않고 연습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



“나의 말씀 한마디를 듣고, 누구 한 사람이 잠시라도 기쁠 수 있고, 한 마디 말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존재 이유가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