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태헌의 한역(漢譯)】


學於溪魚(학어계어)



溪邊坐傷身(계변좌상신)


無心看水中(무심간수중)


魚識生來地(어식생래지)


未有與石衝(미유여석충)


順行自己路(순행자기로)


停止賞風光(정지상풍광)


開口不顧眄(개구불고면)


充腹悠悠行(충복유유행)



路也隨處無(노야수처무)


不斷拓行路(부단척행로)


還復不留戀(환부불유련)


拓路又抹去(척로우말거)



喜樂拓行路(희락척행로)


拓路無心擲(척로무심척)


於彼水中魚(어피수중어)


吾誠有所學(오성유소학)


謂信弱者步(위신약자보)


橫臥悲影數(횡와비영삭)



衆魚無數過(중어무수과)


脚印一個無(각인일개무)


無限廣場裏(무한광장리)


遂入吾身軀(수입오신구)



[주석]


* 學於(학어) : ~에게 배우다. ~에서 배우다. / 溪魚(계어) : 개울의 물고기. ‘溪’는 글의 순화(順化)를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덧보탠 글자이다.



溪邊(계변) : 개울가. / 坐傷身(좌상신) : 아픈 몸을 앉히다.


無心(무심) : 무심히. / 看水中(간수중) : 물속을 보다.


魚識生來地(어식생래지) : 물고기는 살아온 땅[곳]을 안다, 물고기는 살아온 땅[곳]에 익숙하다.


未有(미유) : (여태) 있지 않았다, 없다. / 與石衝(여석충) : 돌과 부딪히다.


順行(순행) : 잘 가다. / 自己路(자기로) : 자기가 가야 할 길, 제 길.


停止(정지) : 멎다, 멈추다. / 賞風光(상풍광) : 풍경을 감상하다, 구경하다.


開口(개구) : 입을 열다. / 不顧眄(불고면) : 두리번거리지 않다, 눈치 보지 않다.


充腹(충복) : 배를 채우다. / 悠悠行(유유행) : 유유히 가다.



路也(노야) : 길. ‘也’는 주어나 목적어[빈어] 뒤에 쓰여 앞말을 강조하는 조사(助詞)이다. / 隨處無(수처무) : 어디에도 없다.


不斷(부단) : 쉬지 않고, 부단히. / 拓行路(척행로) : (갈) 길을 만들다, (갈) 길을 내다.


還復(환부) : 다시, 다시 또. / 不留戀(불유련) : 미련을 두지 않다.


拓路(척로) : 만든 길, 낸 길. / 又(우) : 또. / 抹去(말거) : 지우다.



喜樂(희락) : 기뻐하며 즐거워하다, 즐기다.


擲(척) : 던지다, 버리다.


於(어) : ~에게서, ~에서. / 彼水中魚(피수중어) : 저 물속의 물고기.


吾(오) : 나. / 誠(성) : 진실로, 정말. / 有所學(유소학) : 배운 것이 있다.


謂(위) : ~라 하다, ~라 말하다. / 信(신) : ~을 믿다. / 弱者步(약자보) : 약한 자의 발걸음, 약한 자의 발자국.


橫臥(횡와) : ~을 (가로로) 눕히다. / 悲影(비영) : 슬픈 그림자. / 數(삭) : 자주, 잦다.



衆魚(중어) : (많은) 물고기들. / 無數過(무수과) : 무수히 지나가다.


脚印(각인) : 발자국. / 一個無(일개무) : 하나도 없다.


無限(무한) : 끝이 없다, 무한하다. / 廣場裏(광장리) : 광장 안.


遂(수) : 마침내, 드디어. / 入(입) : ~을 들이다, ~을 집어넣다. / 吾身軀(오신구) : 나의 몸.



[직역]


개울 물고기에게 배우다



개울가에 아픈 몸 앉혀두고


무심히 보는 물 속


물고기들은 살아온 곳에 익숙한지


돌덩이와 부딪히는 일도 없다


제 길을 잘 가다가


멈추고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리고


배를 채우기도 하며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갈 길을 내고


다시 미련을 두지 않고


낸 길은 또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무심히 버리는


저 물속의 물고기에게서


나는 진정 배운 것이 있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주 눕혔구나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무한한 광장 안에


마침내 내 몸을 들인다



[漢譯 노트]


중국이 낳은 대시인 두보(杜甫)는 종이를 살 돈이 없어 딸아이의 낡은 치마폭에 시를 적은 적이 있을 정도로 극빈(極貧)의 삶을 살았지만, 시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하여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라는 천고(千古)의 금언(金言)을 토설(吐說)하고 평생을 그러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러니 어찌 그가 위대하지 않겠는가! “말이[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는 이 말이, 시에 대한 그러한 열정이, 어쩌면 오늘날의 많은 시인들 가슴속에서도 여전히 들끓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기가 막히는 비유(比喩)나 깊은 사색에서 끌어올린 철리(哲理), 따뜻하게 세상을 어루만지는 인정(人情) 등을 그 주무기로 삼는가 하면, 맹문재 시인의 이 시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관찰을 바탕으로 우리가 익히거나 실천해야 할 가치를 끌어내며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기왕에 ‘시는 낯설게 하기’라는 말이 있었으니, ‘시는 놀라게 하기’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유소년 시절에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개울에 물고기 떼가 보이면 돌멩이를 집어 들어 던지고는 했던 역자는 이 시 앞에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물고기는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가는데”, 역자가 물고기에게 던졌던 그 옛날 돌멩이가 이제는 세상이 내게로 던지는 돌멩이 되어 역자의 몸과 마음에 아프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라고 한 이 시구는 기본적으로 시인이 추구하고 싶은 가치, 곧 약자의 편에 서리라는 다짐이 ‘생각 따로, 행동 따로’가 되고 마는 것에 대한 반성이지만, 이는 달리 사회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기도 하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내로남불’ 역시 이 범주 안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원시는 연 구분 없이 18행으로 이루어진 시이지만, 역자는 편의상 네 단락 22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단락마다 모두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또 단락마다 운(韻)을 달리 하였다. 이 한역시의 압운자(押韻字)는 ‘中(중)’·‘衝(충)’·‘光(광)’·‘行(행)’, ‘路(로)’·‘去(거)’, ‘擲(척)’·‘학(學)’·‘삭(數)’, ‘無(무)’·‘軀(구)’이다.


2019. 9. 24.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