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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75)은 1997년 외환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해 2~11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다 공직을 떠났다. 위기가 다가오는 걸 지켜...
우골탑(牛骨塔).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모가 내다 판 소의 유골로 세워진 탑(대학)이라는 뜻이다. 과거 부모세대는 힘든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자식을 어떻...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눈에 띄게 달라진 사회지표 중 하나가 자살률이다. 1994년 10만 명당 9.5명이던 자살률은 1998년 18.4명으로 급증했다. 2000년대 들어선 ...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지만, 기업 도산 위험은 계속되고 외환·증권시장은 심하게 출렁거렸다. 미국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당선 이틀 뒤인 1997년 12월20일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불러 나라 곳간 형편부터 물었다. 외환위기를 ...
외환위기 전만 해도 가계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는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은행들이 가계보다 더 ‘돈이 되는’ 대규모 기업대출에 매달...
데이비드 립턴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사진)는 “최근 지정학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단기 성장 전망은 개선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한국인은 여전히 1997~1998년 외환위기 시절을 ‘IMF(국제통화기금) 때’라고 부른다. ‘IMF는 구조조정을 ...
대우그룹이 해체의 길로 들어선 건 외환위기가 터지고 2년 뒤인 1999년. 당시 11개 계열사는 통째로 팔리거나 사업 부문별로 분할 매각되면서 각자의 길...
부산외국어대 92학번 김모씨(44)는 이른바 ‘IMF(국제통화기금) 세대’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곧바로 대학을 졸업해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내몰렸다. 그...
“1998년의 봄은 내 일생에 가장 아픈 날들의 연속이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
“불어난 외형이 아니라 경제 체질의 민낯에 주목해야 한다.”(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화려한 거시지표의 유혹 때문...
외환위기는 극복 과정에서 경제 및 산업구조의 전환, 경제 전반의 제도 변화 등을 통해 새로운 성장 활력을 찾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
미셸 캉드쉬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얼굴)가 “한국이 외환위기 때처럼 유동성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ldqu...
1997년 12월3일 한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서명 현장을 TV로 지켜보며 테이블 한쪽에 앉아있던 은발의 사내를 기억하는 국민들이 지...
동화은행 퇴직자 가운데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재기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경험이 삶의 거름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문창기 이디야...
1998년 6월29일. 서울 적선동 동화은행 본점에 근무하던 김모 대리(51·현재 무직)는 TV 저녁 뉴스를 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
“한국 경제는 풍전등화 상태인데 정부, 기업, 노동계 모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사진)은 9일...
1995년 5월 한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상향 조정했다. 22개 등급...
경제위기는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20년 전 외환위기 때 그랬다.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샐러리맨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았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