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가나전 후 손흥민(오른쪽)을 다독이는 벤투 감독. /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8일 가나전 후 손흥민(오른쪽)을 다독이는 벤투 감독. / 사진=연합뉴스
알고 보면 흥미로운 스토리가 가득한 월드컵 역사다.

3일 펼쳐진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최종전에서 자국 대표팀이 대한민국 대표팀에 패한 포르투갈의 마르셀루 헤벨루 지 소우자 대통령은 한국 측에 ‘축하 메시지’를 냈다. 반면 같은 시각 우루과이와 맞붙은 가나는 나나 아쿠포아도 대통령까지 나서 “우루과이에 대한 복수를 기다려왔다”고 강조했고 끝까지 우루과이의 발목을 잡아 16강 진출을 좌절시켰다.

헤벨루 지 소우자 대통령이 자국 대표팀의 패배에도 축하 인사를 전한 것은 한국 대표팀 파울루 벤투 감독이 포르투갈 출신으로, 우리 대표팀을 맡기 전에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일간 ‘코레이오 다 마냐’ 등에 따르면 헤벨루 지 소우자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보다 좋은 전력을 갖췄지만 오늘 경기에선 한국이 더 잘했다. 벤투 감독은 포르투갈의 축구를 잘 간파했다”고 평한 뒤 “벤투 감독은 유능한 포르투갈 지도자다. 한국 팀을 잘 이끈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사실 앞서 2승을 거둬 이미 승점 6점을 확보한 포르투갈은 이날 한국에 져도 16강 진출이 보장됐다. 다만 16강 대진에서 G조 1위 ‘세계 최강’ 브라질을 피하려면 H조 1위 여부가 중요했다. 포르투갈은 같은 조 우루과이가 가나에 승리하면서 한국에 패해도 조 1위가 가능한 상황을 맞았다.
3일 포르투갈전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사진=뉴스1
3일 포르투갈전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사진=뉴스1
실제로 포르투갈은 2승1패 조 1위로 한국과 함께 16강에 올랐다.

시곗바늘을 20년 전 2002 한일 월드컵으로 돌려보면 포르투갈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무승부를 기록하면 한국과 포르투갈 양팀의 16강 동반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포르투갈 에이스 루이스 피구는 한국 선수들에게 “비기면 같이 올라가니 살살 하자”는 취지로 말을 건넸다는 후문. 하지만 후반 터진 박지성의 그림 같은 골로 한국이 1-0 승리, 포르투갈의 16강행은 좌절됐다.

당시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로 한국전에 뛰었지만 탈락의 고배를 든 벤투 감독은 20년이 지나 이번엔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조국에 패배를 안겼다.

추가시간 손흥민의 킬패스에 이은 황희찬의 극장골로 2-1 역전승을 거둔 대표팀은 그러나 곧장 환호하진 못했다. 같은 시각 진행되던 가나-우루과이전이 더 늦게 끝났기 때문이다. 우루과이가 2-0으로 앞서고 있어 한국과 동률에 골득실 차까지 같았다. 우루과이가 추가시간에 한 골만 더 넣으면 골득실에서 앞서 우리나라 대신 우루과이가 16강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6강 진출이 어려워진 가나는 우루과이를 물고 늘어졌다. 0-2로 지고 있던 가나가 골킥 상황에서 마치 이기고 있는 팀처럼 시간을 끌거나 후반 추가시간 교체 카드를 꺼내 들어 경기를 지연시킨 게 그랬다. 골을 넣어 추격하기보단 우루과이의 추가 골 기회를 막아 탈락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가나전을 앞두고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한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 / 사진=AFP
가나전을 앞두고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한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 / 사진=AFP
가나가 더 이상 추가 실점을 하지 않으면서 한국은 다득점에서 우루과이를 앞서 극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가나가 우루과이에 이를 간 이유가 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8강전에서 가나와 맞붙은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는 골이나 다름없는 가나의 헤딩슛을 손으로 막았다. 이른바 ‘나쁜 손’ 반칙에 가나는 페널티킥을 얻었으나 실축했다. 결국 승부차기 혈전 끝에 우루과이가 4강 티켓을 가져갔다.

때문에 가나는 이번에 우루과이와 같은 조로 편성되자 단단히 별렀다. 아쿠포아도 대통령이 직접 “12년 동안 기다려왔다”며 복수를 공언했을 정도였다. 남아공 월드컵 멤버인 가나 미드필더 이브라힘 아유는 “가나가 (수아레스의 ‘나쁜 손’ 사건 직전까지) 아프리카 최초로 4강에 진출할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래서 가나 전체가 수아레스를 미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아레스는 가나전을 앞두고 “사과하지 않겠다. 그때 퇴장 당하지 않았느냐”는 말로 가나 선수들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가나는 우루과이에 져 16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우루과이의 발목을 잡은 것을 위안 삼았다. 경기 후 가나 수비수 대니얼 아마티는 “우루과이가 한 골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동료들에게 ‘우리가 16강에 갈 수 없다면 우루과이도 못 가게 막자’고 했다”고 털어놨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