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TPC 크레이그 랜치(파72·7468야드) 16번홀(파4). 이경훈(30)이 파 퍼트를 준비하던 중 하늘에서 번쩍, 뇌성이 울렸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AT&T 바이런 넬슨 최종 4라운드에서 3타 차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 악천후로 대회가 중단되면서 이경훈의 퍼트는 2시간30분이나 미뤄졌다. 경기가 재개된 뒤 이경훈의 퍼트는 홀을 비껴갔고, 보기를 기록했다.

상승세가 꺾이고 흔들릴 수 있던 그때, 이경훈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17번홀(파3)에서 피칭웨지를 들고 티샷에 나선 그는 공을 홀 1.2m 앞까지 붙였고 버디를 만들어 냈다. 마지막 18번홀(파5)에서도 2온에 성공한 뒤 2퍼트로 버디를 잡아냈다. 최종 합계 25언더파 263타. 이경훈이 PGA투어 80번째 도전 끝에 우승자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2015 상금왕, 미국에 도전하다

단단한 멘탈·공격적 플레이…이경훈, 79전80기 드라마 썼다
이경훈은 잘나가던 선수였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2015년, 2016년 한국프로골프(KPGA) 최고 권위의 한국오픈을 2연패했다. 일본프로골프 투어(JGTO)에서도 2승을 올렸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2016년 돌연 미국으로 향했다. “세계 최고 선수들과 겨뤄보고 싶다”며 PGA 콘 페리 투어(2부)에 도전한 것. 하지만 벽은 높았다. 한·일 골프를 제패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시골 호텔을 전전하며 대회에 참가했다. 밤늦게 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15개 대회를 치르며 번 돈은 5000달러(약 567만원). 2015년 코리안투어 상금왕에게 무명의 설움은 더 사무쳤다.

그래도 낙담하지 않았다. “나의 가장 큰 재능은 노력하는 자세”라는 그의 말처럼, 이경훈은 우직하게 도전을 이어갔고 2018년 PGA투어로 올라갔다. 지난해까지 커트 통과보다 탈락이 더 많았을 정도로 잘 풀리지 않았지만 올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 2월 피닉스오픈에서 4라운드 내내 60대 타수를 치며 공동 2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도 좋은 흐름이 이어졌다. 첫날 공동 6위를 시작으로 2라운드 공동 3위, 3라운드에서는 단독 2위로 치고 올라갔다. 그는 4라운드 내내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샘 번스(25·미국)에게 1타 뒤진 2위로 라운드를 시작했지만 2∼4번홀에서 3연속 버디를 잡으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이후 6, 8번 홀에서도 1타씩 줄이며 2위권 선수들과 3타 차까지 간격을 벌렸다. 9번홀(파5) 티샷 실수로 이번 대회 통틀어 두 번째 보기를 기록했지만 12번홀(파5)에서 다시 1타를 줄이며 3타 차 리드를 지켰다.

그의 공세에 흔들린 탓인지 번스는 보기와 버디를 오가며 타수를 크게 줄이지 못했다. 결국 이경훈은 4라운드에서 버디 8개를 몰아치며 생애 첫 PGA투어 우승을 거머쥐었다.

“부담 없이 즐기는 플레이”로 공세

이경훈의 진짜 강점은 단단한 멘탈이다. 쟁쟁한 선수들과 챔피언조로 올라 경기를 치르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4라운드 첫 티샷에서 우드나 아이언을 선택한 경쟁자들과 달리 이경훈은 드라이버를 들었다. ‘나 자신의 플레이를 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장면이다.

2시간30분간 경기가 중단된 동안에는 “리더보드를 보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경기가 재개된 뒤 아깝게 보기를 기록했지만 이경훈은 안전한 길로 가지 않았다. 격차를 지키기보다는 더 벌리는 쪽을 택했다. 17번홀에서 선보인 날카로운 티샷은 버디로 이어졌고 18번홀에서도 세 번째 샷에서 이글을 노리는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마지막 홀,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킨 뒤 아내 유주연 씨를 끌어안을 땐 벅찬 기쁨이 묻어났다. 2018년부터 투어를 동행해온 유씨는 오는 7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이경훈은 “우승하면 어떻게 할까 상상을 많이 했는데 막상 너무 신나서 세리머니도, 하이파이브도 다 잊어버렸다”며 “이 모든 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다”고 기뻐했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상금 145만8000달러(약 16억4000만원)를 따냈다. 20일 개막하는 메이저 대회 PGA 챔피언십 출전권과 2022~2023시즌 PGA투어 카드까지 확보했다. 아내에게 더없이 멋진 출산 선물을 안긴 셈이다. 이경훈은 “아내가 임신한 뒤 좋은 일, 감사한 일이 정말 많이 일어났다”며 “아빠가 된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진짜 예쁘게 딸을 잘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