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시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에비앙챔피언십 최종 라운드. 고진영(24)은 한 번의 실수면 우승이 날아가는 살얼음판 승부 속에서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거의 매 홀 공을 가장 멀리 보낸 ‘장타자’ 박성현(26)이 앞을 섰다. 비거리가 가장 짧으면서도 홀에 공을 바짝 붙이는 ‘컴퓨터 골프 천재’ 김효주(24)가 뒤에서 샌드위치처럼 고진영을 둘러쌌다. 경기 시작을 두 시간 지연시킨 비바람도 고진영을 괴롭혔다.


베테랑 캐디 데이브 브루커는 13번홀(파4)을 앞두고 ‘보스’ 고진영의 무표정 속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10번홀까지 3타를 줄이다가 12번홀(이상 파4)에서 한 타를 잃은 뒤였다. 13번홀을 앞두고 브루커는 챙겨온 껌을 고진영에게 건넸다. 고진영은 빠른 속도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진영은 그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그러자 숱한 위기를 헤쳐내며 선두 자리를 지켜오던 김효주가 무너졌다. 고진영에게 4타 차 앞선 채 경기를 시작한 김효주는 14번홀(파3)에서 친 티샷을 벙커에 빠뜨렸다. 벙커 턱 바로 앞에 깊숙이 박힌 공을 쳤지만 공은 힘없이 벙커로 다시 굴러들어와 김효주의 발자국 속에 갇혔다. 세 번째 친 샷도 벙커를 간신히 벗어나 그린 에지에 섰다. 보기 퍼트가 빗나간 뒤 1.5m 정도의 더블 보기 퍼트마저 왼쪽으로 당겨졌다. 순식간에 3타가 날아갔다. 갑자기 찾아온 2타 차 리드. 고진영은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17번홀(파4)에서 쐐기 버디 퍼트를 성공했고 마지막 18번홀(파5)을 여유롭게 파로 막으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에비앙챔피언십이 고진영의 ‘대관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캐디와 환상 호흡…세계랭킹 1위 탈환

고진영은 현 세계 최고 여자골퍼들과 펼친 기분 좋은 ‘집안 싸움’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고진영은 이날 프랑스 에비앙레뱅 에비앙리조트GC(파71·6527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5개와 보기 1개로 4언더파 67타를 쳤고, 최종합계 15언더파 269타를 적어내 정상에 올랐다. 공동 2위인 김효주와 펑산산(중국), 제니퍼 컵초(미국)와는 2타 차였다.

LPGA투어 통산 5승째를 신고한 고진영은 그중 3승을 올 시즌 거두며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갔다. 올 시즌 3승을 쌓은 건 고진영이 유일하다. 또 3승 중 2승을 메이저대회로 장식하면서 ‘큰 무대 체질’임을 과시했다.

고진영은 이번 우승으로 지난달 24일 이후 5주 만에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우승상금 61만5000달러(약 7억2000만원)를 보태 시즌 상금 1위(198만3822달러)로 올라섰다. 이미 올해의 선수와 평균타수 부문 1위였던 고진영은 주요 타이틀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올 시즌 ‘LPGA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고진영은 고비 때마다 자신을 잡아준 캐디에게 공을 돌렸다. 브루커는 박지은(40)과 한 번, 로레나 오초아(48·멕시코)와 두 번 메이저 우승을 합작했고 고진영과 올해만 메이저 트로피 두 개를 들어올렸다.

고진영은 또 2016년 전인지(25) 이후 3년 만에 하늘에서 태극기가 내려오는 장관의 주인공이 됐다. 에비앙은 관례에 따라 시상식에서 스카이 다이버들이 우승자 국기를 들고 하강한다. 태극기를 어깨에 둘렀을 때까지만 해도 생글거리던 고진영은 애국가가 퍼지자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낯선 타국에서 태극기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애국가가 울렸을 때 참을 수 없이 벅찼다.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파죽지세 K골프…올 시즌 벌써 10승

고진영을 비롯해 한국 선수들은 대거 상위권을 점령하며 ‘K골프’의 저력을 뽐냈다. 경기 초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김효주는 한 번의 불운에 침몰했지만 ‘가능성’을 확인했다. 최근 5개 대회에서 준우승 두 번을 포함해 모두 ‘톱10’ 안에 드는 상승세였던 터라 ‘화룡점정’이 못내 아쉬웠다.

박성현은 이날만 4타를 잃었지만 공동 6위로 대회를 마쳐 ‘톱10’에 들었다. 5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슈퍼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노린 박인비(31)는 9언더파 공동 8위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선수들은 이번 주까지 열린 총 21개 대회에서 절반에 가까운 10승을 합작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