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가 5번홀에서 그린을 바라보고 있다 / KLPGA 제공
박인비가 5번홀에서 그린을 바라보고 있다 / KLPGA 제공
17일 강원 춘천 라데나CC(파72·6246야드)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두산매치플레이챔피언십(총상금 7억원) 연습 그린에 서 있던 박인비의 손에는 익숙한 퍼터가 쥐어 있었다. 그의 수많은 메이저대회 우승을 함께 했던 오디세이사의 ‘화이트 핫 투볼’, 이른바 ‘투볼 퍼터’였다. 이 모델은 2001년 처음 출시된 후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는 등 아마추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국민 퍼터’이기도 하다. 한 눈에 봐도 ‘나이’가 느껴질 정도로 그의 퍼터는 상처 투성이였다.

이를 지켜보던 박인비의 코치이자 남편인 남기협 씨는 “(박)인비가 퍼터를 자주 바꾸는데 지난달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 롯데챔피언십부터 투볼 퍼터를 들고 나왔다”며 “이전에는 다른 퍼터를 쓰다가 결국에는 투볼 퍼터로 다시 돌아왔고, 그러자 인비가 신기하게도 다시 ‘퍼팅감이 좋다’며 자신 있어 했다”고 말했다. 박인비의 캐디 브래드 비처는 “박인비가 퍼터를 자주 바꾸는데 여러 퍼터를 시도하더니 결국 제일 자신 있는 투볼 퍼터를 택하더라”라고 전했다.

뚜껑을 열자 경쟁자의 저항은 거셌다. 지난 2개 라운드에서 2승을 거둔 박인비는 이날 역시 2승을 거두고 온 장은수와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쳤다. 장은수가 초반부터 3연속 버디를 잡는 등 첫 4개 홀을 쓸어 담으며 박인비를 누르는 듯 했다.

박인비의 ‘비밀병기’는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5번홀(파4)과 6번홀(파5)에서 연속 버디로 2홀을 따라 잡은 박인비는 9번홀(파4)에서 약 10m 거리의 장거리 버디 퍼트를 성공하며 영점을 잡았다. 12번홀(파5)에서 1홀 더 따라 붙은 그는 15번홀(파4)부터 3연속 버디를 낚아채며 기어코 경기를 뒤집었다. 16번홀(파3)에서 나온 9m 거리의 버디 퍼트, 승부를 결정 지은 17번홀(파4)의 약 5m 버디 등은 모두 그의 퍼터 끝에서 시작했다.

박인비는 이날 장은수를 2홀차로 꺾고 3승으로 1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지난해 이 대회에서 KLPGA투어 첫 승을 신고한 그는 16강에서 한화의 후원을 받는 김지현을 상대한다. 2008년 시작한 이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박인비의 '투볼 퍼터' / 조희찬 기자
박인비를 제외한 다른 조의 ‘톱 시더’들은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2번 시드를 받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 퀸’ 유소연 8번 시드를 받은 장하나까지 모두 이날 짐을 쌌다. 10번 시드의 박민지와 11번 시드의 이승현도 예선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올 시즌 상금랭킹 1위이자 3번 시드를 받은 최혜진도 덜미를 잡혔다.

대회 주최측은 우승후보들이 조기탈락하지 않도록 2017년부터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기존 64강 ‘녹아웃’ 토너먼트 제도에서 조별리그로 예선 방식을 변경했다. 조 1위가 16강에 진출한다. 덕분에 우승이 유력한 선수들을 최대한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다. 올해 A그룹에는 영구시드권자, 롤렉스랭킹 상위자, 지난해 상금순위 상위 선수 등 16명으로 A그룹을 꾸렸다. 하지만 톱랭커들이 대거 탈락하면서 예선 방식이 무색해졌다.

‘슈퍼 루키’ 조아연도 2승 1무를 거두며 8번 시드를 받은 장하나를 최하위로 밀어내고 1위에 올라 16강에 진출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57번 시드로 출전했다.

조아연은 “매치플레이는 정말 변수가 많은 경기 방식이기 때문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때로는 공격적으로 또 때에 따라선 방어적으로 경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상대가 그린을 지키거나 놓치느냐에 따라 경기 운영 방식도 변하기 때문에 일단은 멀리 보내 세컨샷을 늦게 하는 게 유리한 것 같다”며 “그런면에서 장타자가 여러모로 유리한 것 같다”고도 했다. 조아연은 올해 244야드를 보내 드라이브 비거리 31위에 올라있다.

춘천=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